‹ 목록으로 숨긴 신분, 겨눈 화살

1화

늦겨울의 산자락은 아직 봄의 기척조차 허락하지 않은 채 매섭게 얼어붙어 있었으니, 황서아는 그 차가운 바람을 뚫고 몰래 산문을 빠져나온 지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아 발밑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오라비 황무진의 눈을 피해 산 아래 세상을 한 번이라도 구경해보고 싶었던 그 소박한 마음이,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화끈한 통증 앞에서는 어이없이 작아지고 말았는데, 그녀는 넘어지는 와중에도 옷깃을 여미며 누군가에게 이 모습을 들키지 않기를 바랐으니, 그것이야말로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자의 첫 번째 실수였다. 손끝에 닿은 낯선 풀의 진액이 이내 손목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하자, 그녀는 그것이 예사 풀이 아님을 직감했으나 몸을 일으킬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하늘은 잿빛으로 낮게 가라앉아 산봉우리를 짓누르듯 드리워 있었고, 마른 나뭇가지 끝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낮게 울며 날아올랐는데, 그 울음소리가 점점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자신의 정신이 서서히 흐려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입술이 검푸르게 변하고 손끝이 차갑게 굳어가는 그 순간에도, 그녀는 천궁문의 여식이라는 신분을 감추어야 한다는 생각만은 놓지 않았으니, 그것이 그녀가 배워온 유일한 처세였다. 그때 산길을 오르며 약초 망태를 짊어진 소년의 발길이 우연히 그쪽으로 향했으니, 바로 약선문 제2제자 서도현이었다. 그는 스승 허현담의 명으로 겨울 약초를 캐러 나온 참이었는데, 거칠고 무뚝뚝한 인상과는 달리 눈만은 매서울 정도로 밝아, 저 멀리 비탈 아래 쓰러진 여인의 옷자락 빛깔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발걸음을 서둘러 다가가 여인의 입술 색을 확인하고는 대번에 다급함을 드러내며 지체 없이 손목을 잡아 맥을 짚었다. "흑사초 독이군. 이대로 두면 한 시진도 못 넘기겠다." 그는 낮게 혀를 차며 중얼거리고는, 짊어지고 있던 망태를 그대로 내던지고 여인을 등에 업었다. 뜻밖에 가벼운 몸무게와, 손끝에 닿은 매끄러운 옷깃의 촉감이 그녀가 결코 평범한 산골 처녀가 아니라는 것을 말없이 일러주고 있었으나, 서도현은 당장 캐물을 여유조차 없었다. 그는 산길을 미끄러지듯 내려가면서도 등 뒤의 숨소리가 점점 옅어지는 것을 느끼며 걸음을 다그쳤으니, 마른 가지가 발밑에서 부러지는 소리마저 그에게는 조급함의 재촉으로 들렸다. 휘이잉— 바람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치듯 불어왔으나, 그는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산 중턱의 약초막에 다다랐다. 오두막 문을 발로 밀어 열고 여인을 눕힌 뒤, 그는 스승에게 배운 대로 흑사초 독의 해독약을 서둘러 달이기 시작했는데, 화롯불이 타닥거리며 오두막 안을 데우는 동안 그의 손은 절구와 약탕관 사이를 분주히 오갔다. 약재를 다듬는 손끝이 거칠었으나 그 움직임만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으니, 오랜 수련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손이었다. 해독약을 억지로 흘려 넣은 뒤, 그는 여인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마른 수건으로 닦아주면서도 무뚝뚝한 표정을 풀지 않았으나, 그 손길만큼은 뜻밖에 조심스러웠다. 밤이 깊어 창호지 밖으로 별빛조차 스미지 않을 무렵, 여인이 가늘게 눈을 뜨자 그는 대번에 팔짱을 끼며 물었다. "이름이 뭐요. 이런 산속에서 그런 좋은 비단을 걸치고 있을 리가 없는데." 황서아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으나, 곧 침착함을 되찾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아영이라 합니다. 산 아래 마을에서 나물을 캐러 나왔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거짓을 말하는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천궁문의 여식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이 은혜조차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계산이 그녀의 혀를 붙잡았다. 서도현은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의 손과 옷깃을 다시 훑었으나, 곧 됐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죽이 담긴 사발을 내밀었다. "일단 먹기나 해요. 독이 완전히 빠지려면 며칠은 걸릴 테니까." 그의 말투는 여전히 무뚝뚝했으나, 사발을 건네는 손끝은 그녀의 손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레 각도를 맞추고 있었다. 그날 밤, 오두막 문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유난히 차가웠고, 황서아는 낫지 않은 발목의 통증보다 자신이 처음으로 뱉은 거짓말의 무게가 더 아프다는 것을 느끼며 잠을 청했다. 화롯불이 사그라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는데, 그때마다 서도현이 등을 돌린 채 약초를 손질하는 그림자가 벽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도, 그녀를 구한 서도현도 알지 못했으니, 오두막 밖 어둠 속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낯선 눈길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산 능선 너머로 달이 기울고, 그 그림자가 유독 길게 늘어지며 오두막 창호지 위로 슬며시 스며들었는데, 그 그림자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한 채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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