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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강혁은 걸음도 없이 순식간에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걸어왔다는 표현조차 사치스러웠다. 마치 공간 자체가 접혀 그를 우리 눈앞으로 끌어당긴 것처럼, 조금 전까지 저 멀리 있던 존재가 어느새 코앞에 서 있었다. 서은과 도윤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나는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저 존재가 발산하는 기운만으로도 다리가 뻣뻣하게 굳어왔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폐 속으로 들어오는 공기 하나까지 저놈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옷깃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서 있는 그를 보며,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마수 한 마리 잡았다고 좋아하던 게 몇 시간 전인데. [하계에 떨어진 지 며칠도 안 되어 마수를 잡았다고 하더구나. 흥, 그 정도로 이 몸을 놀라게 할 수 있다 생각했느냐?] "놀라게 할 생각 없었는데요. 그냥 살려고 한 거지." 목소리가 떨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속으로는 이미 오만 가지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도망칠 방향, 서은과 도윤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동선, 천빙정을 끌어올릴 시간. 전부 무의미한 계산이었지만, 그거라도 하고 있어야 미치지 않을 것 같았다. [말투가 여전히 방자하구나. 하계로 내려보내며 분명 경고했을 텐데.] "경고를 받은 적은 있는데, 제가 워낙 기억력이 나빠서요." 농담으로 넘길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입이 먼저 움직였다. 습관이었다. 무서울 때 웃긴 소리를 하는 버릇. 강혁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재미없는 개그를 들은 것처럼, 그냥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이었다. 강혁이 검을 뽑았다. 그 동작은 너무 느긋해서, 오히려 그게 더 무서웠다. 서두를 필요조차 없다는 뜻이었다. 검신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게 보였다. 저게 검광이라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새도 없이 그가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쩌엉! 엄청난 충격파가 숲을 뒤흔들었다. 나무들이 통째로 쓰러지고,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소음과 함께, 발밑의 땅이 움푹 꺼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며 천빙정의 힘을 끌어올렸다. 냉기가 몸을 감싸며 방패처럼 충격을 흡수했지만, 그래도 온몸에 뻐근한 통증이 밀려왔다. 뼈마디 하나하나가 통째로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미친...!" 입에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검광 한 번에 이 정도라니. 저게 진짜 실력으로 온 게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냥 인사 대신 가볍게 흔들어본 정도였다. "괜찮으세요?!" 서은이 다급하게 외쳤다. 나는 겨우 일어서며 답했다. "괜찮을 것 같지가 않은데요." 무릎이 후들거렸다. 손끝이 시렸다. 천빙정의 냉기를 억지로 끌어 쓴 대가였다. 몸속에서 뭔가가 빠르게 소진되는 감각이 느껴졌다. [제법이구나. 그 몸으로 이 몸의 검을 한 번 받아냈으니.] 강혁이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오히려 더 오싹했다. 마치 실험 대상을 보는 눈이었다. 값을 매기는 눈이었다. 이 물건이 얼마짜리인지, 어디까지 버틸지 가늠하는 눈. [네놈 안에 있는 그것, 아직 완전히 눈뜨지 못했구나. 그러니 이 정도밖에 못 버티는 게지.] '저놈 말이 맞다. 아직 부족해.' 천빙정이 처음으로 다급하게 말했다. 평소의 능글맞은 여유는 사라지고, 목소리에 절박함이 배어 있었다. 그게 오히려 더 불안했다. 저놈이 저렇게 급해질 정도면, 이건 정말로 심각한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뭐가 부족한데." '네가... 아니, 지금은 설명할 틈이 없다. 일단 물러나거라.' 물러날 곳이 없었다. 강혁이 다시 검을 들어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자세였다. 손목이 더 안쪽으로 꺾여 있었고, 검신에서 뿜어지는 빛이 조금 더 짙어졌다. [이번엔 좀 더 세게 가마.] 그 말투에는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이쪽에서는 죽고 사는 문제인데, 저쪽에서는 그냥 손 운동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게 화가 났다. 무서운 것보다 화가 더 났다. 그 순간 서은이 앞으로 나섰다. 지팡이를 들어 자신이 가진 마력을 전부 쏟아붓듯 냉기를 강혁 쪽으로 쏘아냈다. 파랗게 빛나는 냉기 줄기가 허공을 가로지르며 강혁을 향해 날아갔다. 도윤이 놀란 눈으로 누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서은은 이미 지팡이를 놓지 않고 있었다. "당신, 뭘 하는 겁니까?!" 내가 외쳤다.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걸 서은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나섰다는 게, 그 순간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간을 벌 순 있을 것이오!" 서은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이 사람이 정말로 자기 몸을 던질 각오를 했다는 걸 알았다. 서은의 냉기가 강혁의 앞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강혁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파리 한 마리가 얼굴 앞을 지나간 것처럼, 신경조차 쓰지 않는 태도였다. [하급 종족 계집이 감히 성선의 앞을 막느냐.] 강혁의 손이 슬쩍 움직이는 것만으로 서은이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몸이 종이인형처럼 가볍게 날아가 나무 사이로 처박혔다. 도윤이 비명처럼 누나를 부르며 달려갔다. 나는 그 순간 뭔가가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는 표현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계산 같은 건 없었다. 손해와 이득을 재는 그 얄팍한 습관마저 사라졌다. 그냥 몸이 먼저 움직였다. 손끝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색깔이 파란색에서 거의 하얗게, 서리 같은 빛으로 변해 있었다. 손끝이 아니라 팔 전체가, 아니 가슴 안쪽에서부터 얼어붙는 감각이었다. 뱃속에서 천빙정이 놀란 듯 짧게 신음했다. '...이건, 설마...' 말이 끊겼다. 늘 능글맞고 여유롭던 그놈이, 처음으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문장이 도중에 끊기고 파편처럼 흩어졌다. 그 어색한 침묵이 오히려 더 큰 신호였다. 저놈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정확히 모른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대로 강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강혁이 검을 들어 막으려 했지만, 내 손에서 뿜어진 냉기가 검신을 그대로 얼려버렸다. 순식간이었다. 검신을 타고 서리가 번져 올라가더니, 손잡이 근처까지 새하얗게 굳어버렸다. [뭐, 뭣...!] 강혁의 눈에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방금까지 실험 대상을 보던 그 눈이, 이제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얼어붙은 검이 그의 손에서 쩡,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균열이 검신 전체로 퍼지는 소리가, 그 짧은 순간에도 선명하게 들렸다. 그가 급히 검을 놓고 뒤로 물러섰지만, 나는 그보다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나도 몰랐다. 발이 땅을 밟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몸이 그렇게 움직였다. "방금 뭐라고 했죠? 하급 종족이라고 했나요?" 내 목소리가 낮게 깔려 나왔다. 내 목소리인데도 내 것 같지 않았다. 강혁의 얼굴에 처음으로 균열이 갔다. 성선이라는 존재의 얼굴에 처음으로, 인간이 지을 법한 표정이 스쳤다. [네놈... 대체 무슨 짓을...] 대답할 새도 없이, 나는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엔 강혁의 목덜미를 향해서였다. 손끝에서 뻗어나가는 냉기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를 휘감으려 했다. 그가 검을 잃은 채 뒤로 튕겨 나가며 나무에 부딪쳤다. 쿠웅, 소리와 함께 나무가 통째로 쓰러졌다. 흙먼지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강혁이 흙먼지 속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기색이었다. 옷자락에 흙이 묻어 있었다. 그 별것 아닌 모습이,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것보다 낯설게 느껴졌다. [말도 안 되는...] 그가 이를 악물고 나를 바라봤다. 처음으로 그 얼굴에서 여유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면서도 나는 안도할 수 없었다.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여유를 잃은 신적 존재가 다음에 무슨 짓을 할지, 나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서은과 도윤이 멀찍이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은은 나무에 부딪힌 팔을 감싼 채 겨우 몸을 일으켜 있었고, 도윤은 그런 누나를 부축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 다 입을 벌린 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 역시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손끝이 저려왔다. 아니, 손끝만이 아니었다. 팔 전체, 가슴 안쪽까지 서늘한 감각이 퍼져 있었다. 다만 확실한 건, 이 힘을 완전히 끌어낸 건 처음이었고, 그 대가로 몸속 어딘가가 서늘하게 비어버린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뭔가를 빌려 쓰고 아직 갚지 못한 느낌. 그 빚이 언제 어떤 식으로 돌아올지 알 수 없다는 게 더 무서웠다. '...이신우.' 천빙정이 낮게 나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능글맞은 여유가 아니라 뭔가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조심스러움이었다. 저놈이 나에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낸 적은 처음이었다. '지금 네 몸속에서, 이 몸조차 예상 못 한 것이 일어나고 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볼 틈도 없었다. 강혁이 다시 자세를 고쳐 잡으며 낮게 웃었기 때문이다. 검을 잃은 손을 툭툭 털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유를 되찾으려 애쓰는 웃음이었다. [재밌구나. 아주 재밌어. 이걸 백호와 이룡이 알면 뭐라 할지 궁금하구나.]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강혁 하나로도 이 정도인데, 저 이름들이 붙는 존재가 몇이나 더 있다는 뜻일까. 몸속에서 다 써버린 냉기가, 그 예감만으로 다시 조금씩 곤두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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