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짐승의 뿔이 옆구리를 노리고 파고들었다. 나는 몸을 틀어 피했지만, 완전히 피하진 못했다. 옷자락이 찢어지며 살갗이 살짝 베였다. 뜨거운 통증보다 먼저 든 생각은, 이거 생각보다 빠르네, 였다.
계산이 빗나갔다는 게 제일 짜증났다. 셋 중 가장 느릴 거라고 판단한 놈이 제일 먼저 달려든 거였다.
"뒤로 빠지세요!"
서은이 소리쳤다. 나는 대답할 여유도 없이 다시 짐승의 다리 쪽으로 냉기를 밀어 넣었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 많은 기운이 필요했다. 손끝이 시려오고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무리하지 마라. 아직 몸이 이 기운을 다 못 받아낸다.'
"지금 그 소리 할 때가 아닌데."
짐승의 다리가 얼어붙는 속도가 조금 전보다 느렸다. 확실히 뭔가 부족했다. 마치 통장에서 잔액도 안 확인하고 카드를 긁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더 많은 기운을 끌어냈다. 코에서 뜨끈한 게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코피였다.
'경고했다.'
억울했다. 경고랍시고 한 문장 던져놓고 책임은 하나도 안 지는 게, 딱 보험회사 약관 같았다.
그 순간 짐승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시야가 잠깐 흐려졌다가 곧 돌아왔다. 무릎에 닿는 흙이 차가웠고, 그 차가움이 오히려 반가울 지경이었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서은이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얼굴에 자잘한 상처가 나 있었다. 검은 망토는 반쯤 찢어져 있었고, 그 안으로 보이는 옷도 엉망이었다. 늘 흐트러짐 없던 그 여자가 이 정도로 망가진 걸 보니, 상황이 얼마나 나빴는지 굳이 설명 들을 필요가 없었다.
"괜찮으세요?"
"안 괜찮아 보이는데 왜 물어봅니까."
"...그러게 말이오."
서은이 짧게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온다는 게 신기했다. 아니면 웃지 않으면 다른 걸 할 것 같아서 억지로 웃는 걸지도 몰랐다.
"도윤이는요?"
"숨은 쉬고 있소. 다행히 크게 상하진 않은 것 같소."
다행이다 싶었지만, 곧 취소해야 했다. 짐승 세 마리를 잡느라 다 뻗어버린 우리 상태를 보니, 다행이라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팔이 후들거렸다. 며칠 굶은 것도 아닌데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이거, 대체 왜 이렇게 강한 겁니까? 의뢰서엔 위험도 낮음이라고 적혀 있었잖아요."
서은이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의뢰는 원래 우리 가문에서 나온 게 아니오. 뇌전가에서 흘러나온 정보였소."
"뇌전가요?"
"4대 가문 중 하나요. 우리 박씨 가문과는... 사이가 좋지 않소."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났다. 낮은 위험도라고 적힌 의뢰서가 하필 사이 나쁜 가문에서 나왔다는 게 우연일 리 없었다. 세상 어디를 가나 이런 식이었다. 정보라는 게 공짜로 흘러다닐 리가 없다는 걸, 나는 이 세계에 오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설마 일부러 정보를 속인 겁니까?"
서은의 표정이 굳었다.
"확실친 않소.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우리 남매가 여기서 죽었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 거요."
말이 가벼웠지만 내용은 무거웠다. 가문 간의 알력 다툼에 이 남매가 미끼로 쓰인 셈이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거기 끼어든 외부인이었다.
"그럼 이거, 그쪽 가문에서도 알고 있습니까? 뇌전가랑 사이 안 좋다는 거."
"당연히 알고 있소. 대놓고 싸운 적도 몇 번 있었으니."
"그런데 왜 그런 곳에서 흘러나온 의뢰를 그냥 받은 겁니까?"
서은이 나를 힐끗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의뢰료가 좋았소. 그리고 다른 사냥꾼들이 다 거절한 걸 우리가 잡았소. 사정이 급했으니까."
솔직한 대답이었다. 솔직해서 더 짜증이 났다. 결국 돈 때문이라는 거였고, 그 돈 때문에 하마터면 셋 다 여기서 짐승 밥이 될 뻔했다는 소리였다.
'재밌지 않느냐. 이 세계도 결국 사람 사는 곳과 다를 게 없다.'
천빙정이 낄낄거렸다. 나는 그 말에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대꾸할 기운이 있었어도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도윤이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면서도 검을 놓지 않는 걸 보니 근성은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더니 얼굴이 붉어졌다.
"누님, 그럼 우리가... 뇌전가 놈들 계략에 걸린 거였습니까?"
"그런 것 같다."
"그 새끼들, 진짜...!"
도윤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어린 나이에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게 눈에 보였다. 손등에 핏줄이 설 정도로 세게 검자루를 움켜쥐고 있었다.
"당장 가서 따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죽을 뻔했는데!"
"따지러 가면 뭐라고 할 것 같으냐. 증거 있냐고 물을 거다. 없으면 그냥 억지 부리는 걸로 몰릴 거고."
서은이 냉정하게 잘랐다. 어린 동생보다 훨씬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화가 나는 것과 별개로, 머리는 차갑게 돌아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런 여자라 다행이다 싶었다.
"그럼 그냥 참으라는 겁니까?"
"참으라는 게 아니라,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거다. 일단 살아서 돌아가는 게 먼저지."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먼저입니다. 화는 나중에 내시고요."
내가 말리자 도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얼굴은 붉었지만, 검을 다시 등 뒤로 돌리는 걸 보니 조금은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얼어붙은 짐승들 사이를 지나 숲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얼음이 덮인 짐승의 몸뚱이가 뿌옇게 서리가 앉은 채로 우두커니 서 있는 걸 지나칠 때마다, 살짝 소름이 돋았다. 죽은 건지 얼어서 정지된 건지 구분이 안 가는 그 모습이 묘하게 불쾌했다.
그런데 몇 걸음 못 가서 서은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뭔가 온다."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나도 그제야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숲 전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짐승들도, 벌레들도, 모든 소리가 뚝 끊겼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디선가 풀벌레 우는 소리,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배경처럼 깔려 있었다. 그게 사라진 순간, 세상이 통째로 숨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도윤도 뭔가 느꼈는지 검을 다시 뽑아 들었다.
"누님, 이거 뭐죠?"
"모른다. 하지만 좋은 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그 정적 속에서, 하늘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쿠웅.
땅이 크게 흔들렸다. 발바닥으로 그 진동이 그대로 올라왔다. 흙먼지가 확 일었고, 그 먼지 속에서 사람 형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앞을 보니 사람 형체가 서 있었다. 흰옷을 입고 검 한 자루를 든 남자였는데, 아무리 봐도 이 세계 사람 같지 않았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서은과 도윤이 동시에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사냥꾼 짬밥이 있는 두 사람이 저렇게 즉각적으로 몸을 사린다는 게, 저 형체가 얼마나 이질적인 존재인지를 말해줬다.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정확히 나였다. 마치 이 숲에 우리 셋과 얼어붙은 짐승들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듯이.
[찾았다.]
낮고 예스러운 목소리가 숲을 울렸다. 목소리라기보다는 머릿속을 직접 두드리는 진동 같았다. 나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강혁이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목이 잠겨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코피가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상태였고, 다리는 여전히 후들거렸다. 이런 몰골로 저런 존재를 마주해야 한다는 게 억울했다.
[네놈이 하계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궁금해서 와봤느니라. 힘을 좀 썼다고 들었다.]
힘을 좀 썼다는 표현이 지나치게 겸손하게 들렸다. 방금까지 코피를 쏟으며 짐승을 얼려 죽인 사람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저 존재 앞에서 그런 말장난을 할 정신은 없었다.
뱃속에서 천빙정이 조용해졌다. 평소 그렇게 말이 많던 놈이,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게 더 불안했다.
서은이 슬쩍 내 옆으로 붙어서 낮게 물었다.
"저게... 뭐요? 아는 사람이오?"
"아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골치 아픈 존재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짧은 몇 마디로 저 남자가 어떤 위치에 있는 존재인지 알려줄 수도 없었고, 지금 그럴 시간도 없었다. 강혁의 시선이 여전히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그 시선 하나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도윤도 검을 쥔 채로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상대를 가늠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포기한 듯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게 보였다. 검을 들고 있어봐야 소용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챈 모양이었다.
강혁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 한 걸음에 담긴 무게가 땅을 다시 한번 울리는 것 같았다.
[하계의 벌레들과 노느라 재미있었느냐.]
"벌레라니, 사람한테 그런 표현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혁의 눈빛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 작은 변화 하나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이건 그냥 인사치레로 끝날 만남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