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한성 강씨 무가의 뒷마당, 정확히는 장작더미가 쌓여 있는 창고 뒤편에서 나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는데, 조현민이라는 이름의 외성제자가 내 앞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흙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무릎 뼈를 타고 골반까지 스며들었고, 등 뒤에서는 저녁 바람이 장작 냄새와 마른 낙엽 냄새를 섞어 실어왔다. 계절이 바뀌는 걸 이런 자리에서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강태민, 너 이 상황이 뭔지는 알고 있냐" 하고 그가 물었을 때, 나는 이미 대답할 말을 준비해두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준비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어차피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저 인간의 결론은 정해져 있었을 테니까. 결론이 이미 나 있는 문제에 답을 준비하는 건, 배점이 0점인 문제를 밤새 푸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요컨대 사정은 이랬다. 박기수라는, 5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가문의 노비였던 남자가 조현민에게 도박빚을 졌고, 그 빚을 갚을 방법이 없어지자 눈을 돌린 곳이 하필 나였다는 것. 폐적자에 결맥체질,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전신의 기맥이 완전히 막혀 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으로 낙인찍힌 나는, 이 무가에서 가장 손쉽게 짓밟을 수 있는 존재였다. 부모님이 5년 전 실종되고 사망 소식만 전해진 이후로, 나는 보호자 없는 폐인이었으니까. 무가라는 조직에서 보호자 없는 폐인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먹이사슬 최하단, 그것도 먹이사슬 안에 들어 있다고 쳐줄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위치.
"10일이다" 라고 조현민이 손가락을 하나 펼쳐 보이며 말했다. "10일 후, 연무장에서 결투를 하는 거야. 지면 네가 가진 전 재산 넘기고, 그것도 모자라면..." 그가 말을 끌다가, 씩 웃으며 덧붙였다. "목숨까지 내놔야지."
'전 재산이라니, 내가 가진 게 뭐가 있다고'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부모님이 남긴 것 중 남은 거라곤 다 허물어진 별채 하나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낡은 의료 기록 몇 뭉치뿐이었으니까. 그 별채조차 지붕 절반이 무너져 비가 오면 방 안에 대야를 두 개는 놓아야 했고, 의료 기록이라는 것도 좀먹은 종이 뭉치일 뿐이라 땔감으로도 못 쓸 물건이었다. 그마저도 조현민이 노리는 건 실은 재산이 아니라 명분이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폐적자를 죽이는 데도 절차가 필요한 게 이 무가의 웃긴 규칙이었고, 결투라는 형식은 그 절차를 채우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데" 하고 물었을 때, 조현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마 이 상황에서도 말을 붙이는 내가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지금 여기서 죽는 거지." 그가 태연하게 말했고, 뒤에 서 있던 박기수가 낄낄대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어찌나 가벼운지, 사람 목숨을 논하는 자리에서 나올 법한 소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공자님,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는 배려한 거예요" 라고 박기수가 끼어들었는데, 그 '배려'라는 단어가 어찌나 뒤틀리게 들렸는지 나는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5년 전까지 우리 집 마당을 쓸던 남자가 지금은 내 앞에서 목숨을 논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 자체가 이 가문의 현실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예전에는 저 남자가 내 앞에서 고개도 제대로 못 들었다는 걸 떠올리면, 세상 참 빠르게 뒤집힌다는 생각이 들었다. 5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사람 처지가 이렇게까지 뒤바뀌는 건 강산이 변하는 것보다 더 요란한 일 같았다.
"그래서, 10일 뒤에 뭘 어쩌라는 건데" 하고 되물었다. 어차피 결론이 정해진 대화라도, 최소한 조건은 명확히 들어둬야 했다. 죽는 방식이라도 미리 알아야 하지 않겠나.
"결투에서 이기면 없던 일로 해주지. 근데 그럴 리가 없잖아?" 조현민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너, 기맥이 아예 막힌 몸으로 뭘 어떻게 이길 건데. 10일 동안 뭘 하든 결과는 똑같을 거야."
그 말에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는 게 더 서글펐다. 결맥체질이라는 세 글자 앞에서는, 어떤 노력도 결과를 뒤집을 수 없다는 게 이 세계의 상식이었으니까.
결맥체질. 이 세 글자가 내 인생을 어떻게 바꿔놨는지는, 짧게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무공을 익히는 데 필요한 기맥이 애초에 통하지 않는다는 건,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는 뜻이었으니까. 방계 제자들이 나를 볼 때마다 비웃음을 흘렸던 것도, 노비들이 나에게 함부로 손을 댔던 것도, 모두 그 세 글자 때문이었다. 폐적자라는 호칭은 덤이었고. 어릴 때는 그래도 부모님이 방패막이가 되어줬으니 이 정도로 노골적인 취급은 아니었는데, 두 분이 사라진 이후로는 방패가 사라진 자리를 아무도 대신 채워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 빈자리를 서로 먼저 물어뜯으려고 달려드는 게 이 무가의 생태였다.
"10일 후에 못 나오면 그날로 네 별채 문짝을 부숴버릴 거야." 조현민이 몸을 돌리며 마지막으로 던진 말이었다. 그의 등 뒤로 노을이 지고 있었는데, 그 광경이 어찌나 태연하게 아름다운지, 나는 순간 이 상황이 얼마나 부조리한지를 다시금 실감했다. 하늘은 저렇게 붉게 잘도 물드는데, 그 아래서 사람 하나가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게 우스울 지경이었다. 자연은 사람 사정 따위 봐줄 생각이 없다는 걸, 이럴 때마다 새삼 깨닫는다.
박기수가 뒤따라가며 나를 한 번 흘겨봤다. "그동안 편하게 지낸 값을 치를 때가 됐지" 하는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왔지만,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할 힘도, 이유도 없었으니까. 편하게 지낸 값이라니, 지붕이 반쯤 무너진 집에서 5년을 버틴 게 그렇게 편해 보였다면 저 남자의 기준이 어지간히 낮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사라진 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무릎이 흙바닥에 눌려 아팠지만, 그 통증조차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통증이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걸 확인해주는 유일한 감각이었다. '10일'이라는 숫자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는데, 그건 마치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결투에서 지면 죽는다는 건, 은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병원 한번 못 가보고 죽을 판인데, 사인은 심지어 병명도 아니고 '결투 패배'라니. 나중에 사망 기록에 뭐라고 적힐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간단한 계산을 해봤다. 10일이면 240시간. 그 안에 결맥체질을 뚫는다는 건, 이 무가의 그 누구도 성공한 적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결맥체질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몸의 구조 문제였고, 후천적으로 뚫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전설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상식적으로는 답이 없는 문제였다. 그런데도 나는 이상하게, 답이 없다는 결론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발버둥 치고 싶어지는 게 사람 심리인가 싶기도 했고, 아니면 그냥 억울해서였는지도 몰랐다.
결맥체질인 내가 10일 만에 강해질 방법이 있을까. 그런 방법이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이상하게 그 자리에서 일어나 별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라도 해야 했다. 가만히 앉아서 목이 잘리길 기다릴 수는 없었으니까.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앉아 있는 것보다는 걷는 게 나았다. 적어도 걷는 동안에는 뭔가를 하고 있다는 착각이라도 들었으니까.
별채로 향하는 길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담벼락 사이로 스며드는 마지막 햇빛이 자갈길 위에 길쭉한 그림자를 늘어뜨렸고, 그 그림자를 밟으며 걷는 동안 나는 별별 생각을 다 했다. 도망칠까, 하는 생각도 잠깐 스쳤지만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곧 깨달았다. 무가의 영역을 벗어나면 호적조차 없는 폐적자 신분으로 바깥세상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건 그냥 좀 더 느리게 죽는 길일 뿐이었다.
별채로 향하는 길, 다 허물어진 창고 앞을 지나며 나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저 안에 부모님이 남긴 유품 중 아직 열어보지 않은 상자가 있다는 걸, 나는 그제야 떠올렸다. 5년 동안 손대지 않았던 상자였다. 왜 지금까지 열어보지 않았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갔는데, 아마 그 안에 뭐가 들었든 부모님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만 재확인하게 될까 봐 미뤄뒀던 것 같았다. 슬픔을 마주하는 게 무서워서 상자 하나를 5년이나 방치해뒀다니, 참 한심한 일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10일 후에 죽을 목숨이라면, 미뤄왔던 슬픔 따위를 두려워할 여유도 없었다. 창고 문을 밀자 삐걱, 하는 소리가 어둠 속으로 퍼져나갔고, 나는 그 소리를 신호탄처럼 여기며 안으로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