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시험장 안은 조용했다.
책상마다 응시자가 앉았고, 감시관들이 사이를 오갔다.
나무 바닥을 밟는 감시관들의 발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렸다.
돌로 지어진 시험장은 사방이 트여 있었으나, 그 넓은 공간이 오히려 숨 막히게 느껴졌다.
향시(鄕試)였다.
지방의 수많은 인재들이 모여 첫 관문을 다투는 자리.
나는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책상은 백여 개가 넘었다. 그 책상마다 응시자가 하나씩 앉아 시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고, 몇몇은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저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떨림이 남아 있었다.
전생에서는 이보다 훨씬 큰 시험장에서, 훨씬 많은 인재들 사이에서도 담담했다.
이번에는 아니었다.
이 몸이 가진 긴장은 전생의 기억으로도 지워지지 않았다.
북소리가 세 번 울리자 시제(試題)가 내려왔다.
시험관이 큰 목소리로 시제를 읽었다.
"춘궁기의 백성을 다스리는 법에 대해 논하라."
간단한 문장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함의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춘궁기는 곡식이 떨어지고 새 곡식이 나지 않는 때를 뜻했다. 그 시기의 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은, 굶주림과 반란의 경계를 다스리는 일이었다.
법으로 다스릴 것인가, 은혜로 다스릴 것인가.
수많은 학자들이 답을 내놓았지만 어느 것도 완전하지 않았다.
나는 붓을 들었다.
손끝이 떨렸다. 붓끝이 종이에 닿지 못한 채 잠시 허공에 머물렀다.
먹 냄새가 코끝에 스몄다.
전생에서는 이런 시제를 하룻밤에 열 편씩 써냈다. 이번에는 붓 한 자루 드는 것조차 힘겨웠다.
이 몸의 손은 아직 붓을 오래 쥔 적이 없었다. 굳은살 없는 손끝이 붓대를 낯설게 감쌌다.
숨을 골랐다.
다시 붓을 내렸다.
답을 쓰기 시작했다.
첫 문장을 쓰는 데 오래 걸렸다. 그러나 한 문장을 완성하고 나니 다음 문장은 조금 더 쉽게 이어졌다.
법의 엄격함과 은혜의 유연함, 그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써 내려갔다.
다만 답의 절반만 채웠다. 나머지 절반은 비워두었다.
일부러 그렇게 했다.
전생의 지식을 모두 드러낼 수는 없었다. 지금은 그저 향시에 붙을 정도, 그 이상은 보여선 안 되었다.
너무 뛰어난 답은 오히려 의심을 살 것이었다. 몰락한 가문의 자제가 갑자기 이런 통찰을 보인다면, 그것을 곱게 볼 사람은 드물 것이다.
힘을 숨기는 것도 힘이라는 것을, 나는 스승에게서 배웠다.
*드러난 재능은 시기를 부르고, 숨겨진 재능은 때를 기다린다.*
스승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옆줄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다.
풍중루였다.
그가 붓을 놀리다 말고, 손끝에서 작은 불씨를 피워 올렸다.
선향 하나가 스스로 타올랐다.
연기가 가늘게 위로 피어올랐다. 향내가 시험장 안에 은은히 퍼졌다.
감시관이 흠칫 놀랐다.
"이건…"
"문심화입니다."
풍중루가 담담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여유가 묻어났다.
"글에 마음을 집중하면 불이 인다고, 그런 이야기 들어보셨습니까."
감시관은 잠시 말을 잃었다.
주위 응시자들의 붓이 멈추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 작은 불꽃으로 쏠렸다.
"이런 신묘한 재주는 규정 위반이 아닙니다. 향내로 시제를 재는 향시의 관례이지요."
풍중루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의 웃음에는 여유가 있었다. 이 시험장의 규칙을,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정확히 알고 있는 자의 웃음이었다.
감시관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그러나 완전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계속 그를 주시했다.
주위 응시자들의 시선이 그에게 몰렸다.
소문으로만 듣던 문심화를 직접 본 이는 드물었다.
누군가는 낮게 감탄사를 흘렸고, 누군가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그 불꽃을 바라보았다.
작았지만 뜨거웠다.
마음이 집중된 만큼 강렬한 불이었다.
선향이 다 타들어가는 동안, 그 불꽃은 흔들림 없이 곧게 위로 솟았다.
옆줄, 조금 떨어진 곳에서 교거정이 그 모습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의 손끝에도 미미한 열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그는 곧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답안에 몰두했다.
그 손끝의 열기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규율을 어기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같은 힘을 지녔으되, 드러내는 방식은 정반대였다.
풍중루는 힘을 무기로 삼았고, 교거정은 힘을 감추는 방패로 삼았다.
나는 그 대조를 눈에 담았다.
전생에서 만났던 수많은 인재들이 떠올랐다. 재능을 드러내 이름을 얻은 자들과, 재능을 숨겨 오래 살아남은 자들.
둘 중 어느 쪽이 옳은지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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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이 반쯤 지났을 무렵, 뒤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감시관님! 이자가 답안을 훔쳐보았습니다!"
진태욱의 목소리였다.
그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붓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먹물이 종이 위로 살짝 번졌다.
감시관이 다가왔다.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무슨 일이오."
"이자가 제 답안을 훔쳐보았습니다. 몰락한 가문이 향시에 붙으려고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진태욱이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이미 승리를 확신하는 여유가 있었다.
감시관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특별한 편견은 없었다. 다만 사실을 확인하려는 눈빛이었다.
"자리를 바꾸어 앉지 않았소."
"진 공자의 자리는 저와 두 줄 떨어져 있습니다."
나는 조용히 답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서는 보이지 않는 거리입니다."
"거짓말이다!"
진태욱이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시험장 전체에 울렸다. 몇몇 응시자들이 붓을 멈추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감시관이 잠시 두 자리 사이의 거리를 눈으로 재보았다.
한 걸음, 두 걸음. 감시관은 직접 걸어 거리를 확인했다.
"확실히 거리가 있소."
"그럼 이자가 몰래 자리를 옮겼을 겁니다!"
"응시자의 자리는 명부에 미리 지정되었고, 감시관 세 명이 처음부터 지키고 있었소."
감시관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그가 명부를 꺼내 확인했다. 내 이름과 자리 번호가 명확히 적혀 있었다.
"공연한 소란을 피운 죄로 진 공자의 답안에 감점을 매기겠소."
"뭐라고!"
진태욱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얗게 변했다.
"이건 부당합니다!"
"부당한 것은 없는 죄를 만들어 다른 응시자를 몰아붙인 쪽이오."
감시관은 더 말을 섞지 않고 자리로 돌아갔다.
장내가 다시 조용해졌다.
붓 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다시 시험장을 채웠다.
진태욱은 나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담긴 것은 분노만이 아니었다.
굴욕이었다.
네 번째 응시에서, 몰락한 가문의 후손 앞에서 굴욕을 당한 것이었다.
그의 손이 책상 아래에서 떨리고 있었다. 분을 참으려는 듯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전생에서는 이런 시비에 힘으로 답했다. 이번에는 말로 답했다.
둘 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전생의 나는 힘이 있었기에 두려워하지 않았고, 지금의 나는 힘이 없었기에 두려움을 삼켜야 했다.
그 차이가 컸다.
진태욱은 결국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답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붓끝은 한동안 종이 위에서 헛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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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이 끝나갈 무렵, 나는 마지막 문항에 답을 적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며 시험장 안의 빛이 옅어지고 있었다.
몇몇 응시자는 이미 답안을 제출하고 자리를 떠났고, 몇몇은 아직 붓을 놓지 못한 채 초조하게 시간을 재고 있었다.
답안 끝에 이름과 함께 짧은 문장을 하나 더 남겼다.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법보다 앞서는 것은 신뢰다.*
전생에서 스승이 자주 하던 말이었다.
법은 사람을 묶지만, 신뢰는 사람을 움직인다고, 스승은 그렇게 말했다.
이 문장이 시험관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너무 앞선 생각으로 보일지, 아니면 그저 어린 응시자의 치기로 보일지.
다만 그것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붓을 내려놓았다.
손끝의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손바닥에 밴 땀이 그제야 느껴졌다.
북소리가 울렸다. 시험 종료를 알리는 소리였다.
응시자들이 답안을 제출하고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줄을 지어 감시관에게 답안을 건네는 모습이 마치 하나의 의식처럼 느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오랜 시간 긴장한 몸이 그제야 반응을 보이는 듯했다.
동수가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과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형님, 어떠셨습니까."
"모르겠다."
솔직한 말이었다.
내 답이 얼마나 부족했는지, 아니면 얼마나 지나쳤는지, 스스로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시험장을 나서는 길, 진태욱이 나를 다시 지나쳤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눈빛에 담긴 살기가 이전보다 짙어졌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오늘의 일이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동수도 그 눈빛을 느낀 듯 내 옷깃을 슬쩍 잡아끌었다.
"형님, 저자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안다."
나는 짧게 답했다.
마당을 벗어나는 순간, 나는 옥패가 다시 미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가슴에 품고 있던 옥패에서 낯익은 냉기가 스며 나왔다.
이번에는 분명했다.
무언가에 반응하고 있었다.
시험장 마당을 벗어나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그 떨림은 그치지 않았다.
바람이 불었다. 서늘한 바람이었다.
시험은 끝났지만, 무언가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