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뜨거웠다.
분명 그랬어야 했다.
용암이라면, 살이 타고 뼈가 녹아야 정상이니까. 불구덩이 속에 던져진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눈을 뜨는 일 같은 건, 적어도 내가 아는 세상의 이치에는 없었다.
그런데 아무 감각이 없었다.
눈을 떴다.
검은 하늘이 먼저 보였다. 별이 없었다. 별이 없는 밤하늘이라는 게 이렇게 낯설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여기 어디야.'
뒤통수가 딱딱한 흙바닥에 닿아 있었다. 등에 잔돌이 배겼다. 아팠다. 아, 아프긴 아프구나. 그 사실 하나가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가슴을 더듬었다. 옷은 그대로였다. 예복 그대로, 금실 자수까지 그대로였다. 다만 흙이 잔뜩 묻어 원래 색이 뭐였는지 짐작하기 힘들 정도였다.
손끝에 상처 자리가 느껴졌다. 서연의 손이 뚫고 지나간 자리.
정확히 심장 위였다.
손가락으로 그 자리를 눌러봤다. 상처는 없었다. 옷에도 구멍이 없었다. 그런데 그 위치만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몸이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죽었잖아, 나.'
분명 죽었다. 그녀의 팔이 내 가슴을 관통했을 때, 통증조차 느끼기도 전에 눈앞이 하얘졌으니까. 그 순간의 감각은 지금도 선명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냥 어떤 흰색.
그런데 지금 이렇게 눈을 뜨고, 숨을 쉬고 있었다.
숨을 쉰다는 게 이렇게 이상한 감각이었나. 가슴이 부풀고 가라앉는 그 단순한 움직임이, 마치 처음 배우는 동작처럼 어색했다.
몸을 일으켰다. 팔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서 한 번 휘청였다.
옆에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강도진, 궁의 무관 자제였다. 훈련으로 다져진 몸이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게 이상하게 어색해 보였다. 그 옆엔 목소연, 예부 관리의 딸. 항상 곱게 땋아 올렸던 머리가 반쯤 풀어져 흙투성이가 돼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백유란과 임재하도 널브러져 있었다.
다섯. 정확히 다섯이었다.
혼인식 대전에 있었던 사람들 중, 나를 포함해 살아 있는 건 이 다섯뿐인 모양이었다. 대전에 있던 인원이 얼마였더라. 스물은 넘었을 텐데.
'왜 우리만.'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냥 재수가 없었거나, 있었거나. 그 이상의 이유를 찾으려 하는 건 사치였다.
주위를 둘러봤다.
대전이었던 곳은 흔적도 없었다. 기둥은 부러져 있었고, 바닥은 갈라져 검은 흙이 드러나 있었다. 지붕은 통째로 사라졌다.
마치 누군가 통째로 이 건물을 씹어 먹고 뱉어놓은 것 같았다.
'여기가 정말 그 대전이라고?'
말도 안 됐다. 그런데 말이 되는 부분도 있었다. 부러진 기둥의 위치, 무너진 계단의 각도. 저기 저 갈라진 바닥, 원래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던 자리였다. 분명 기억 속의 그 대전이었다.
다만 3년, 아니 30년쯤은 방치된 것처럼 낡아 있었다. 기둥에 낀 이끼가, 무너진 돌들 사이로 자라난 잡초가, 그 세월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율?"
목소연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하고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어디야, 우리…"
말을 잇지 못했다. 두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우리 다 죽었다가 여기서 다시 눈 뜬 것 같은데 나도 몰라'라고 할 순 없잖은가.
강도진이 벌떡 일어나 검을 찾으려는 듯 허리춤을 더듬었다. 없었다. 당연히 없었다. 그런 걸 챙기고 죽는 사람은 없으니까.
"내 검이…"
"검이 문제가 아니야."
임재하가 낮게 말했다. 열여섯 치고는 침착한 목소리였다.
"우리, 죽었었잖아."
그 한마디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죽었다. 다들 알고 있었다. 그날, 그 대전에서.
서연의 눈이 붉게 물들던 그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다시 눈이 떠지는 건데.'
백유란이 흙바닥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옷자락을 털어내며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가,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다시 다물었다. 그러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기…"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달이었다.
붉지 않았다. 평범한, 하얀 달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너무 컸다. 원래 저 정도로 큰 달을 본 적이 있었나.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크기였다. 아니, 그럴 리가. 그냥 착시겠지.
'뭔가 이상해.'
확신할 수 없었지만, 뭔가가 근본적으로 뒤틀려 있다는 느낌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목소연도 같은 걸 느꼈는지, 자기 팔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저 달, 원래 저렇게 컸어요?"
목소연이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강도진도, 임재하도, 백유란도 다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누구도 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 순간, 폐허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느리고, 규칙적인 발소리였다. 흙을 밟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밤이 너무 조용해서 그런 걸까.
다섯 명이 동시에 그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나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강도진이 팔을 뻗어 목소연을 자기 뒤로 슬쩍 감췄다.
붉은 옷을 입은 여자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표정이 없었다. 웃는 것도 아니고 화난 것도 아닌, 그냥 아무것도 없는 얼굴이었다. 걸음걸이도 이상하게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미리 정해진 길을 걷는 것처럼.
"일어났구나."
낮은 목소리였다.
"누구세요."
강도진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를 하나씩 눈으로 훑었다.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마치 물건 검수라도 하는 것처럼.
'뭐야, 사람 보는 눈이 왜 저래.'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너희가 지금 살아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여자가 말했다.
"그리고 지금부터 너희가 알게 될 사실은, 아마 견디기 힘들 거다."
그 말투에는 어떤 동정도, 조롱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냥 사실을 나열하는 것 같은, 건조한 어조였다. 그게 더 무서웠다.
그 말과 동시에, 멀리서 짐승의 울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짐승이 아니었다.
사람의 비명이었다. 아주 먼 곳에서, 그러나 분명하게. 여러 명의 비명이 겹쳐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다섯 명 모두 그 소리를 들었다. 목소연이 자기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백유란은 그대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여자, 홍련은 그 방향을 향해 고개를 살짝 돌렸다가 다시 우리를 봤다. 눈빛에 아주 잠깐 뭔가가 스쳐 지나갔는데,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시간이 별로 없어. 따라와."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그녀는 이미 걷고 있었다. 우리가 따라오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한 걸음이었다.
나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채로 그 뒷모습을 쫓았다. 다른 넷도 서로 눈치를 보다가 결국 하나둘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아무도 여기 남아 있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3년이라고 그랬나.'
아직 아무것도 확인된 건 없었다. 여자는 3년이라는 말을 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숫자가 머릿속에 박혀서 떠나지 않았다. 근거도 없는 숫자였는데, 왜 이렇게 확신이 드는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앞서 걷는 홍련의 붉은 옷자락이 어둠 속에서 유독 도드라졌다. 그 뒤를 따라가는 발걸음마다, 방금 들었던 비명 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우리가 향하는 곳에서, 그 비명의 주인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아직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