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그 결말, 내가 바꾼다

4화

그날 밤, 아린은 오랜만에 침대에 몸을 눕히자마자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는데,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참아왔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한 무거운 잠이었고, 그 잠 속에서 마치 오래전에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본 영상처럼 선명한 장면이 서서히 펼쳐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흐릿한 안개 속에서 시작된 그 장면은 점점 또렷해지며 화려한 샹들리에의 불빛과 현악기의 선율,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채워졌고, 마침내 아린은 자신이 열일곱 살의 선우아린이 되어 화려한 무도회장 한복판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를 둘러싼 귀족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차갑고 경멸로 가득했으며, 부채로 입을 가리며 소곤거리는 여인들의 눈빛에는 노골적인 비웃음이 담겨 있었고, 그 시선의 중심에는 새하얀 신성력의 빛에 둘러싸인 성녀 유하은이 이하준의 팔짱을 낀 채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서 있었다. 유하은의 은빛 머리카락은 무도회장의 불빛을 받아 마치 달빛이 스며든 듯 반짝였고, 그녀를 감싸고 있는 옅은 신성력의 빛은 그녀를 더욱 성스럽고 흠결 없는 존재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선우 영애,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하지. 나는 너와의 혼약을 파기하겠다." 이하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그 짧은 한마디가 무도회장의 모든 소음을 순식간에 집어삼켰으며, 이내 곳곳에서 비웃음 섞인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퍼져나갔고, 아린은 그 웅성거림 속에서 홀로 떨리는 손을 감추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왜…… 왜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속으로 되뇌면서도 아린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고,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수백 개의 시선이 마치 날카로운 칼끝처럼 온몸을 찔러오는 것을 느꼈다. "저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전하." 애원 섞인 그 목소리에도 이하준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곁에 선 유하은이 슬픈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낮게 속삭이는 말이 아린의 귓가에 꽂혔다. "아린,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네가 그동안 나에게 한 일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당연한 결과 아닐까." 조롱과 위로가 뒤섞인 그 말에 아린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고, 유하은의 그 슬픈 표정 뒤에 감춰진 얕은 승리감을 눈치챘음에도 그것을 반박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으며, 주변의 귀족들은 그 모습을 보며 마치 한 편의 연극을 감상하듯 낮게 탄식하거나 손뼉을 치기도 했다. 곧이어 장면은 급격히 전환되어, 선우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이 병사들의 발밑에서 짓밟혀 찢겨나가는 광경이 이어졌고, 그 깃발 위에 새겨진 가문의 문양이 흙먼지 속에 뒤섞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는 모습에 아린은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가문은 몰락했고, 부모는 차갑고 어두운 옥에 갇혔으며, 아버지의 절규와 어머니의 흐느낌이 아린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고, 그 모든 비극의 끝에서 아린 자신은 거리로 내쫓겨 차가운 돌바닥 위에 쓰러진 채 서서히 숨을 거두는 장면으로 그 긴 악몽은 마침표를 찍었다. 헉! 숨을 몰아쉬며 눈을 뜬 아린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고, 심장은 마치 터질 듯이 빠르게 뛰고 있었으며,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오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한동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건…… 게임의 결말이야. 원작 그대로의 파국.' 생전에 수십 번이나 지겨울 정도로 지켜봤던 그 엔딩 장면이 이토록 생생하게 되살아난 것에 아린은 몸을 떨었고, 이것이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 이 세계가 그녀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소름이 돋아났다. '그냥 꿈일 뿐이라고 넘길 수는 없어…… 너무 선명했어. 마치 무언가가 나에게 똑똑히 보여주려는 것처럼.' 창밖으로 스며드는 새벽빛을 바라보며 아린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고, 이 세계가 정말로 그녀가 알던 그 게임의 결말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지, 그 불안이 가슴 한켠에 무겁게 자리 잡았다. 다음 날 아침, 아린은 평소보다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이하준을 찾아가 함께 아침 산책을 청했고, 정원을 걷는 동안 슬며시 성전 신관들의 근황을 물었다. 정원에는 이른 아침의 서늘한 공기가 감돌았고, 꽃잎에 맺힌 이슬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였지만, 아린의 마음은 그 아름다운 풍경을 온전히 즐길 여유가 없었다. "요즘 신전 쪽에 새로운 소식은 없나요, 전하?" 무심한 척 던진 질문에 이하준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걸음을 멈추고 답했다. "신전에서 조만간 신성력을 지닌 아이가 발견될 거라는 소문이 있긴 해. 아버님께서도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그 말에 아린의 등줄기로 서늘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고, 겉으로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원작 게임에서 유하은이 신성력을 각성하는 시기가 바로 이 무렵이었기 때문이었고, 그것이 실제로 이 세계에서도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었으며, 그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 아린의 머릿속에서는 지난밤 꾸었던 악몽의 장면들이 다시 한번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런 아이가…… 발견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애써 태연한 척 물었지만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아린은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고, 이하준은 그런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채 무심히 대답했다. "신전에서 특별히 보호하며 키우겠지. 신성력을 지닌 자는 이 나라에서도 귀한 존재니까." 그 대답을 들으며 아린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속으로는 걷잡을 수 없는 불안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예지가 아니었어…….' 속으로 되뇌며 아린은 손끝이 떨리는 것을 애써 감췄고, 이 세계가 게임의 스토리를 그대로 따라 흘러가려 한다는 확신이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으며, 그 확신은 단순한 불안을 넘어 이제는 명백한 위기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반드시…… 반드시 이 흐름을 막아야 해. 그대로 흘러가게 두면 안 돼.'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아린은 몇 번이나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고, 곁에서 걷는 이하준의 무심한 옆얼굴을 바라보면서도 예전처럼 순수하게 그를 바라볼 수 없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느꼈다. 그날 오후, 저택으로 돌아온 아린은 창가에 앉아 신전이 위치한 방향을 오랫동안 바라보았고, 창밖으로 펼쳐진 하늘은 맑고 청명했지만 그 청명함이 오히려 그녀의 불안을 더욱 부각시키는 듯했다.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을까, 그 시선 끝에서 옅은 빛무리가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을 아린은 분명히 목격했다. 분명 눈의 착각이라 하기엔 너무나 선명한, 그리고 너무나 낯익은 빛깔의 신성력의 조짐이었다. '저건…… 정말로 시작된 거야.' 창틀을 움켜쥔 아린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고, 그녀의 눈동자에는 지난밤 꿈에서 보았던 그 파국의 잔상이 겹쳐지듯 스쳐 지나갔으며, 이제 더 이상 이것을 우연이라 치부할 수 없다는 확신만이 서늘하게 가슴 속에 박혀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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