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그 결말, 내가 바꾼다

2화

이하준의 물음에 아린은 한동안 대답을 찾지 못한 채 눈만 데면데면 굴렸고, 심장이 목젖까지 차오르는 듯한 감각에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으며, 다행히 그 침묵을 깬 것은 최말순의 재빠른 웃음이었다. "아이고, 아가씨가 어제 읽으신 동화책 대사를 흉내 내신 모양이에요. 요즘 부쩍 말을 흉내 내기 좋아하셔서요." 능숙하게 상황을 무마하는 그녀의 말에 이하준은 잠시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이 아린의 얼굴을 스치듯 훑고 지나가는 순간 아린은 자신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는데,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 이불 자락을 슬며시 그러쥐었으며, 이내 이하준은 어린아이의 장난이라 여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린의 곁으로 다가와 이마를 짚었다. "열은 다 내렸네. 다행이다." 짧은 안도의 말에 아린은 겨우 숨을 골랐고, 그의 손끝이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그 짧은 온도의 잔상을 느끼며, 그가 등을 돌려 다시 문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며 그제야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방 안에 낮게 울렸다. '조심해야 해……. 정말로 조심해야 해.'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다짐만으로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심장을 달래려 아린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로 걸어갔고, 발끝에 닿는 차가운 바닥의 감촉이 오히려 정신을 차리게 하는 듯했으며, 창을 열고 밖을 내려다보는 동안 아린의 머릿속에는 이 상황과 지독하게 닮은 또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대학교 3학년, 조별 과제 발표를 앞둔 늦은 밤이었다. 나은은 도서관 구석 자리에서 밤을 새워가며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형광등 불빛 아래서 몇 시간째 노트북 화면만 들여다보던 눈이 따가워질 무렵, 발표 자료의 마지막 슬라이드를 완성한 순간 시계를 보니 새벽 세 시를 넘긴 뒤였다. 같은 조였던 한유나는 그날도 다른 약속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떴는데, 그것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고, 나은은 그런 유나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던 스스로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던 기억마저 선명했다. "나은아, 너 이런 거 잘하잖아. 나 대신 좀 해줄 수 있지?" 웃는 얼굴로 건네는 그 말에는 언제나 거절할 틈이 없었고, 나은은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유나의 몫까지 떠안았는데, 그날도 그랬듯 유나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가방을 챙겨 도서관을 나섰고, 나은은 홀로 남아 자료 화면을 넘기며 몇 번이나 같은 문장을 고쳐 쓰다가 문득 손끝이 시려오는 것을 느끼고서야 히터를 켜지 않은 채 몇 시간을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나는 항상 이 자리에 있는 걸까.' 그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진 것이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으나, 답은 늘 같았다. 유나는 밝고 사교적이었으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녀 곁에 모여들었고, 나은은 그런 그녀의 옆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소속감을 느끼는 종류의 사람이었으니까. 발표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교수는 유나를 향해 유독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나은이 밤새워 정리한 자료는 그저 유나의 이름 아래 놓인 배경으로만 존재했는데, 발표가 끝난 뒤 강의실 밖으로 나온 유나가 동기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는 모습을 나은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었다. "역시 우리 조 대표는 유나지." 주변에서 들려오는 그 말에 나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자료를 정리해 가방에 넣었고, 그날 밤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독 별이 밝았다는 사실만이 이상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으며, 가로등도 몇 개 꺼진 골목을 혼자 걸으면서도 서럽다는 감정보다는 그저 무감각한 피로만이 몸을 짓눌렀던 것을 떠올렸다. '노력은 왜 항상 나만 하는데, 보상은 다른 사람이 가져가는 거지…….' 그 물음은 대학 시절 내내 나은을 따라다녔고, 취업을 준비하던 시기에도, 첫 직장에서 성과를 빼앗기던 순간에도 어김없이 되살아났으며, 상사가 회의 자리에서 다른 동료의 이름을 언급하며 나은이 만든 기획서를 칭찬했을 때조차 나은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숙였을 뿐, 그 순간의 억울함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그 씁쓸함은 사고로 죽는 순간까지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마음 한구석에 눌어붙어 있었던 것이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저 멀리 정원에서 붉은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것이 보였고, 바람이 불 때마다 그 붉은 꽃잎들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이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린은 그 붉음을 바라보며 이 세계의 정체를 다시금 되새겼다. 〈천유제국의 장미〉는 성녀 유하은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었고, 그녀가 여러 남성 후보 중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말이 갈리는 구조였는데, 그중 가장 인기 있던 루트가 바로 황태자 이하준의 루트였다. 그 루트에서 악역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선우아린, 이하준의 어릴 적 혼약자였던 공작가의 영애였다. 게임 속에서 아린은 하은을 끊임없이 괴롭히다가 결국 혼약을 파기당하고, 가문의 몰락과 함께 비참한 결말을 맞는 인물로 그려져 있었으며, 그 결말을 수십 번의 플레이로 지켜본 나은의 기억 속에는 그 장면들이 지나치게 선명하게 남아 있었는데, 특히 아린이 마지막 장면에서 차가운 감옥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이하준을 향해 애원하다가 끝내 외면당하는 그 장면만큼은 몇 번을 봐도 손끝이 저릿해질 만큼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이번엔…… 다르게 살아야 해.' 속으로 다짐하며 아린은 작은 손을 꽉 그러쥐었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듯한 통증이 오히려 정신을 붙잡아주는 것 같았으며, 창밖의 붉은 장미가 마치 앞으로 다가올 위험을 예고하듯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노력이 배신당하지 않는 삶, 자신이 쏟은 것만큼 정당하게 돌려받는 삶을 이번에는 반드시 살아내겠다고, 아린은 그 다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어린 손끝에 힘을 주었는데, 그 순간 방금 전 이하준이 지었던 미심쩍은 표정이 다시 눈앞에 떠오르며 가슴 한복판이 서늘하게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설마…… 눈치챈 건 아니겠지.' 그가 문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던졌던 시선이, 어딘가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던 그 눈빛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 아린은 창틀을 붙잡은 손에 힘을 준 채 한동안 정원의 붉은 장미밭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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