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천장 나무 무늬였다.
살았구나.
안도감보다 먼저 허기가 몰려왔다. 뭔가를 씹고 싶었다. 짜장면이나 라면 같은 게 간절했는데, 이 세계엔 그런 게 없다는 사실이 뒤늦게 서글퍼졌다. 대신 머릿속에 떠오른 건 멀건 죽이었다. 그것도 소금 간이 제대로 됐는지 의심스러운, 이 세계 특유의 맹탕 같은 그 죽.
배에서 소리가 났다.
꼬르륵.
"깨셨습니까."
이건우가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었다. 며칠은 못 씻은 것 같은 몰골이었는데, 그 와중에도 옷깃은 흐트러짐 없이 각이 잡혀 있는 게 웃겼다. 이 남자는 죽어가도 예의는 챙길 사람이구나.
"이틀 내내 여기 계셨어요?"
"···학원엔 결석 처리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왕복 여덟 시간을 감내하던 사람이 이틀을 통째로 비웠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편도 여덟 시간이면 얼마나 미친 거리인지, 나는 지금도 감이 잘 안 잡혔다.
"밥은 드셨어요?"
"괜찮습니다."
"그거 안 먹었다는 소리네."
이건우가 살짝 시선을 피했다. 정곡이었다.
"형벌은요?"
"아버지께서 잠정 중단을 명하셨습니다. 다음 등급 실험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자료 부족이 아니라 그냥 사람 살렸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그 후작이란 사람은 아들이 죽다 살았는데도 그걸 실험 데이터로 취급하는 게, 정말이지 인간이 아니라 계량기 같았다.
속으로 삐죽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지만 움직일 수는 있었다. 관절 하나하나가 삐걱대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목 안쪽이 아직도 화끈거렸다. 그 독의 잔재인지, 아니면 그냥 이틀을 누워 있어서 그런 건지 구분이 안 갔다.
"그리고 하나 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이건우가 드물게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 소식부터 들을게요."
"형벌이 끝났습니다. 감찰관 보고서에 '생존 가능성 낮은 등급까지 자력 회복'이라고 기록됐고, 아버지께서 이를 만족스러운 결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게 좋은 소식이에요?"
"살아남았다는 뜻이니까요."
부정할 수가 없었다. 살아남은 게 좋은 소식이라는 게 좋은 소식이라니, 이 집안 기준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헤아리기도 지쳤다.
"나쁜 소식은요."
"장남 형님이, 이번 일을 계기로 당신의 왕도 학원 조기 입학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왜요?"
"가문의 명예 회복 차원입니다. 삼남이 도망쳤다 형벌을 받은 뒤 학원에 우수하게 입학하면, 밖에서는 방탕한 아들을 강하게 훈육한 결과로 포장할 수 있으니까요."
···미친 가족이다, 진짜로.
말이 안 나왔다. 도망친 걸 훈육으로, 죽다 살아난 걸 성과로 포장하는 이 사고방식이 대체 몇 대를 거쳐 내려온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태호 형님이 곧 이곳으로 오실 겁니다. 학원 입학 평가에 대해 직접 설명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렸다.
쿵.
노크도 없었다.
키가 크고 인상이 부드러운 청년이 들어왔다. 옷차림이 이건우와는 완전히 달랐다. 화려한 자수, 반질거리는 구두, 향수 냄새까지. 사교계 인물다운 느낌이 물씬 났다. 향이 은근히 진해서 방 안 공기가 확 달라진 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서준, 정신이 들었구나."
장남 이태호였다. 목소리부터 사람 좋아 보였는데, 그 안에 뭔가 계산적인 기색이 섞여 있었다. 웃는 낯인데 눈은 웃지 않는, 그런 얼굴.
"태호 형님."
몸을 일으켜 앉으며 대답했다. 목소리가 아직 좀 갈라졌다.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왕도 학원 입학 평가가 보름 뒤로 잡혔다."
"···보름이요?"
원래 예정보다 훨씬 이른 일정 같았다. 이건우 쪽을 보니 그도 미리 몰랐던 눈치였다. 그 무표정 아래로 살짝 미간이 좁아지는 걸 놓치지 않았다.
"형님, 원래 다음 학기 아니었습니까."
이건우가 처음으로 끼어들었다.
"상황이 바뀌었다. 아버지께서 서두르라 하셨어."
이태호가 어깨를 슬쩍 들었다 놓았다. 별일 아니라는 투였지만, 그 별일 아닌 일 때문에 나는 침대에 누운 지 이틀 만에 벌떡 일어나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평가는 세 가지다. 학문, 무예, 그리고 사교. 각 영역에서 일정 수준을 넘겨야 정식 입학이 허가된다."
이태호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설명했다.
"학문은 걱정 없을 거다. 넌 원래 총명했으니까."
···내가 총명했다고? 그건 원래 이서준 얘기지, 내 얘기가 아닌데. 이 몸의 이전 주인이 얼마나 공부를 잘했는지는 몰라도, 지금 이 안에 들어 있는 건 수능 국어 지문도 제대로 못 풀던 사람이었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예는 최소 기준만 넘기면 된다. 문제는 사교다."
"사교요?"
"평가위원들이 여는 다과회에 참석해서, 대화와 처신으로 인상을 남겨야 한다. 최근 몇 년간 우리 가문 자제들의 사교 평가가 좋지 않았다."
이태호의 눈매가 살짝 흐려졌다.
"솔직히 말하면, 이번엔 내가 직접 도울 수가 없다. 나는 그날 다른 사교 행사에 참석해야 해서."
"그럼 누가···"
"건우가 동행할 거다."
이건우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사교에 능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형제니까. 없는 것보단 나아."
없는 것보단 낫다는 말을, 저렇게 당당하게 하다니. 형제한테 할 소린가.
이태호는 그렇게 정리하고는 다시 나를 봤다.
"이서준, 부탁이 하나 있다."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방 안 공기가 한 톤 무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번 평가에서, 부자를 견뎌낸 얘기가 이미 사교계에 조금씩 돌고 있다. '이후작가 삼남이 6등급 독을 자력으로 이겨냈다'는 식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게 왜 퍼진···"
"감찰관 보고서가 완전히 비밀은 아니니까. 궁정 쪽 정보상들이 이런 걸 좋아한다."
이태호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향수 냄새가 더 진하게 다가왔다.
"만약 이 평가에서, 네가 뭔가 특이한 능력을 보여준다면, 그건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거다."
【이태호가 당신을 계산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도,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구나. 계산이라니, 시스템 메시지까지 나서서 확인시켜줄 필요는 없었는데.
"그러니 조심해라. 평범하게, 딱 통과할 만큼만."
말은 걱정하는 투였지만 눈빛은 다른 걸 보고 있었다. 나를 어떻게 이용할지 계산하는 눈이었다. 삼남이 너무 잘해도 곤란하고, 너무 못해도 곤란하다는, 딱 그 중간의 애매한 결과를 원하는 눈.
"평범하게라는 게,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여쭤봐도 됩니까."
내가 묻자 이태호가 잠깐 나를 응시했다.
"그건 네가 알아서 조절해야지. 나도 정확한 선은 모른다."
무책임한 대답이었다. 아니, 조절하라면서 기준을 안 주면 나는 뭘 어떻게 조절하나.
이태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탁.
남은 건 나와 이건우, 그리고 무거운 침묵이었다.
이건우가 물 잔을 하나 들고 와 내 옆에 놓았다.
"드세요. 아직 미열이 남아 있으실 겁니다."
물맛은 밍밍했지만 목을 넘어가는 순간만큼은 그 어떤 것보다 반가웠다.
"형님."
"예."
"보름 안에, 저 이상한 목소리를 완벽하게 숨기는 법을 배워야겠네요."
이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요?"
아, 말이 헛나갔다. 그에게는 아직 그 얘기를 안 했었다. 부자를 삼킬 때 들렸던 그 알림음, 시스템 메시지 같은 그 목소리에 대해서.
"아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사교 예절 얘기예요."
어색한 웃음으로 넘겼지만 이건우의 눈빛이 잠시 나를 훑고 지나갔다. 뭔가 눈치챈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저 남자는 눈치가 없는 척하면서 실은 다 알아채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조심해야겠다.
"평가 준비는, 언제부터 시작할까요."
내가 먼저 물었다. 화제를 돌릴 필요가 있었다.
"내일부터 시작하시죠. 사교 예절부터 차근히."
"무예는요?"
"무예는 최소 기준만 넘기면 된다 하셨으니, 기본 동작 몇 개만 익히면 될 겁니다. 문제는 역시 사교 쪽입니다."
이건우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도 이게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창밖으로 왕도로 이어지는 길이 보였다. 흙길 위로 마차 한 대가 느릿느릿 지나가고 있었다.
보름 뒤, 저 길 끝에서 나를 기다리는 게 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평가장에서, 내가 숨기고 있는 것들 중 하나라도 새어 나간다면, 그날로 나는 더 이상 평범한 삼남으로 살 수 없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이상한 목소리는, 내가 원한다고 숨겨지는 물건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