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정원의 흙바닥 위로 빗물이 스며드는 소리가 들렸다.
비가 온 뒤라 흙이 젖어 있었고, 나는 그 위에 무릎을 꿇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방금까지 나는 분명 열두 살의 선우서하였다.
그런데 머릿속에는 스무 살도 넘은, 나도 모르는 기억이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대현왕국의 모든 귀족이 지켜보는 무도회장 한복판에서, 왕태자가 내 얼굴에 술잔을 던졌다.
"이 파렴치한 계집을 당장 끌어내라!"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가문의 문장이 찢겨나가고, 어머니가 오라를 묶인 채 끌려가는 모습이 눈앞에 선명했다.
샹들리에 불빛 아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웃고 있었다.
동정도, 놀라움도 아닌, 순전한 즐거움으로 웃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마저 기억 속에 박혀 있었다.
'이게 대체 뭐지.'
나는 손끝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분명 실제로 겪은 것처럼 생생한데, 지금 내 몸은 아직 그 일을 겪지 않은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작은 손, 짧은 팔, 무릎까지 오는 원피스 자락.
그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숨이 가빴다.
가슴 한복판이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서늘했다.
'이건 꿈이 아니다.'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던 건, 꿈이라면 이렇게까지 세세한 감각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었다.
술잔이 부딪히던 소리, 사람들의 비웃음, 어머니의 마지막 눈빛까지.
모든 것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심지어 그날 마셨던 와인의 씁쓸한 뒷맛까지 입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감각이 살아 있는 걸 꿈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아가씨,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유모의 목소리에 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우산을 받쳐 든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 오는데 감기 걸리시면 어쩌시려고요."
나는 대답 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분명 익숙한 얼굴인데, 조금 전까지 머릿속에 있던 기억 속에서 그녀는 이미 없는 사람이었다.
십수 년 뒤, 유모는 가문이 몰락하기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것도 알고 있다.'
그녀가 앓게 될 병의 이름까지도, 이상하게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손끝의 떨림이 더 심해졌다.
미래를 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형벌에 가까웠다.
앞으로 벌어질 모든 불행을 미리 알면서도 아무것도 못 하고 지켜봐야 한다면, 그건 저주였다.
유모는 내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열은 없으신데…… 안색이 왜 이러실까."
그녀의 손이 따뜻했다.
그 온기가 낯설면서도, 동시에 사무치게 그리운 것 같았다.
곧 사라질 온기라는 걸 알기 때문일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손에 잠시 뺨을 맡겼다.
"아가씨, 방으로 들어가시죠. 이러다 정말 감기 걸리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젖은 치맛자락이 다리에 감겼지만, 그 감각조차 아득하게 느껴졌다.
방으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계속 곁눈질로 유모의 옆얼굴을 살폈다.
주름 하나, 흰머리 한 올까지도 눈에 담아두려는 것처럼.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밤을 새웠다.
머릿속에서 미래의 기억들이 하나씩 정리되었다.
왕태자 이하준과의 혼약, 사교계에서의 위치, 그리고 몰락의 시작점이 되는 무도회.
그 모든 것이 어떤 순서로 벌어지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뚜렷하게 떠올랐다.
혼약이 정해지는 날의 화창한 날씨, 이하준이 처음 건넨 인사말, 그가 나를 바라보던 눈빛까지도.
그 눈빛에는 애정이 없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때는 그걸 왜 몰랐을까.'
몰랐던 게 아니라, 몰랐다고 믿고 싶었던 것이다.
기억 속 나는 그의 무심한 눈빛을 수십 번이나 마주하면서도 애써 다른 의미로 해석했다.
그 어리석음이 지금은 남의 일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왜 하필 나에게 이 기억이 왔을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언젠가 그 무도회장의 장면이 현실이 된다는 것.
창밖으로 빗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나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어머니가 끌려가는 장면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어머니의 손목에 감긴 오라, 그 거친 밧줄의 질감까지도 손끝에 남은 것 같았다.
그녀는 끌려가면서도 나를 향해 입을 벙긋거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 입 모양이 무슨 말이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살아남으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 장면을 몇 번이나 곱씹었는지 모른다.
'죽어도 그렇게는 안 돼.'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직 어린 몸이었지만, 머릿속의 기억만큼은 스무 살 넘은 여자의 것이었다.
그 기억이 나에게 준 것은 공포만이 아니었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 그것은 곧 무기이기도 했다.
무기를 손에 쥔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스스로 목을 내미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며 앞으로 벌어질 사건들의 순서를 되짚었다.
혼약, 사교계 데뷔, 왕태자의 다른 여인, 그리고 파국.
하나씩 되짚을 때마다 손끝이 조금씩 덜 떨렸다.
두려움이 사그라든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방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창밖은 여전히 흐렸지만, 빗소리는 그쳐 있었다.
식탁에 앉은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처음으로 그를 다른 눈으로 보았다.
그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전혀 모르는 채, 딸의 혼약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서하야, 왕태자 전하께서 곧 정식으로 청혼을 넣으실 거란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당신이 딸을 죽음으로 밀어넣는 걸 도울 거란 걸 알면 그 얼굴이 어떻게 될까.'
나는 아무 말 없이 수프를 떠먹었다.
입안에 퍼지는 온기가 낯설게 느껴졌다.
분명 익숙한 저택,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 있는데,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곳이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아버지의 웃음, 하녀들의 발소리, 창밖의 정원수까지도 모든 것이 껍데기처럼 얇게 느껴졌다.
그 껍데기 아래에서 무너져 내릴 미래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걸, 나만 알고 있었다.
'앞으로 나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
그 결심이 가슴 한복판에 뜨겁게 자리 잡았다.
숯덩이처럼 타오르는 그 결심을 안고,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는 아직 몰랐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왕태자와의 혼약, 그것이 내 파멸의 시작점이라는 것.
그렇다면 그 시작점을 없애는 것이, 내가 살아남을 유일한 길일지도 몰랐다.
문제는, 그 혼약이 이미 왕실과 가문 양쪽에서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온 일이라는 것.
열두 살짜리 아이의 말 한마디로 뒤집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수프 그릇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기억 속에서 혼약이 공식적으로 발표되는 날짜까지는, 앞으로 채 반년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