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서윤이 정신을 차렸을 때, 방 안은 어두웠고 몸은 이불 속에 눕혀져 있었다.
머리가 무겁고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온몸의 뼈마디마디에 돌을 매달아놓은 것 같은 감각이었다.
시녀 하나가 놀란 얼굴로 옆에 앉아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정신이 드세요? 갑자기 쓰러지셔서... 저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의원을 부를까요?"
"아니, 괜찮아. 그냥 잠시 어지러웠을 뿐이야." 서윤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너무 급하게 일어난 탓에 눈앞이 다시 흐려졌지만, 그런 내색을 할 여유는 없었다.
팔뚝을 덮은 소매를 확인하며 안도했다. 다행히 문양은 아무도 보지 못한 듯했다. 손끝으로 소매 안쪽을 슬쩍 만져보니, 살갗 위로 번져있는 그 서늘한 무늬가 여전히 느껴졌다.
시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웠다 이내 안심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서윤은 혼자가 되자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또 들켜서는 안 돼.'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위험은 커졌다. 계모의 눈에 걸리는 순간 어떤 취급을 받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한미령이라는 여자는 자비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니까.
***
서윤이 다섯 살이었을 때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했다.
강백작가의 저택 뒤뜰,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던 어린 도현. 저주라 불리던 그 병은 원인도 치료법도 없었고, 의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유명하다는 무녀도, 이름난 의술사도 그 앞에서는 손을 내저으며 물러났다.
그날 서윤은 어머니 한서영의 손을 잡고 그 방에 들어갔다. 방 안에는 삶은 약초 냄새와 촛농 냄새가 뒤섞여 있었고, 침대에 누운 아이는 숨소리조차 희미했다.
"이 아이를 살릴 수 있어요?" 어린 서윤이 물었다.
한서영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직이 말했다. "할 수는 있지만, 그 힘에는 대가가 따른단다. 되돌릴 수 없는 대가야."
"저는 상관없어요." 서윤은 그렇게 말했다. 다섯 살짜리 아이의 순수한 결심이었다. 무엇을 각오하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눈앞의 아이가 죽는 것이 싫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오래도록 딸을 바라보다가, 결국 손을 들어 저주의 실을 걷어냈다.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던 것을, 서윤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대가는 즉시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 몇 년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서윤은 다른 아이들처럼 뛰어놀았고, 아프지도 않았다.
그러나 서윤이 열 살이 되던 무렵부터 조금씩, 아주 조금씩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계단을 오를 때 숨이 가빠졌고, 오래 서 있으면 다리가 후들거렸다. 매년 그 무게가 늘어났다.
"무리하지 마라." 아버지 이강목은 죽기 전 딸의 손을 붙잡고 그렇게 당부했다. 서윤이 열세 살 때의 일이었다. 그의 손은 이미 앙상하게 말라 있었지만, 눈빛만은 또렷했다. "너는 강도현을 살리려고 태어난 게 아니다. 알겠느냐."
서윤은 그 말을 오래도록 기억했다. 그러나 이미 시작한 일을 멈출 방법은 없었다. 저주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소거는 서서히 진행되는 작업이었고, 중단하면 도현의 몸에 그것이 되돌아올 위험이 있었다.
그렇게 서윤은 11년째, 매일 조금씩 자신을 소모하며 그를 지키고 있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알아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
그것이 그녀가 도현의 곁을 떠나지 않는 이유였다. 부채감이 아니라 목표였다. 살아 있는 동안 반드시 그를 완전히 회복시키겠다는, 스스로에게 건 다짐이었다.
그랬는데.
요즘 그 다짐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서윤은 정원을 지나다 우연히 도현과 강소은이 함께 걷는 모습을 보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웃고 있었다. 소은이 무언가 말하자 도현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서윤에게는 보여준 적 없는 표정이었다. 그 웃음에는 어떤 그늘도 없었다. 마치 아프다는 사실을 잊은 사람처럼 맑고 가벼웠다.
서윤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이 미끄러질 뻔했지만, 그것을 신경 쓸 정신도 없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도현이 저렇게 웃는 걸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웃음을 자신에게는 보여준 적조차 없었을지도 몰랐다.
"언니, 여기서 뭐 하세요?" 소은이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우월감이 배어 있었다. "도현 오라버니랑 산책 중이었어요. 언니도 같이 가실래요?"
"아니, 됐어." 서윤은 짧게 답하고 몸을 돌렸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딱딱하게 나온 것을 스스로도 느꼈다.
도현은 그 짧은 대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윤을 향해 시선 한 번 던졌다가 다시 소은에게로 돌아갔을 뿐이었다. 그 시선에는 미안함도, 반가움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무심함뿐이었다.
서윤은 등 뒤에서 들리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정원을 벗어날 때쯤, 그녀는 거의 뛰다시피 하고 있었다.
***
그날 오후, 서윤이 학원에서 돌아왔을 때 방 안의 공기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서랍들이 조금씩 열려 있었고, 옷장의 옷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누군가 급하게 뒤진 흔적이었다. 정리를 잘하는 시녀들의 손길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누가 들어왔었나.'
서윤은 서랍을 뒤져보다가 곧 그 안에 있던 작은 유리병 하나가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몸의 통증을 잠시 억누르기 위해 어머니의 서재에서 챙겨온 약병이었다. 검은 액체가 담긴, 겉으로 봐도 심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절대 남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한미령이 손에 그 유리병을 들고 서 있었다. 얼굴에는 의심과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입가에는 이미 승리를 예감한 듯한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게 뭐지, 서윤 양?"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방을 뒤진 게 아니라, 청소를 하다 우연히 발견했다고 해두마. 그런데... 이 색깔, 이 냄새. 이게 대체 무슨 약이니?"
병을 흔들어 보이자 안의 검은 액체가 벽면에 부딕치며 탁한 소리를 냈다.
서윤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