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약혼자님, 배신은 늦으셨어요

2화

새벽에 몰래 일어나 정원으로 나갔다. 문을 열 때마다 삐걱, 소리가 날까 봐 손잡이를 아주 천천히 돌렸다. 다행히 이 방은 오래된 저택 중에서도 가장 조용한 구석이라, 밤에는 그 누구도 이쪽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발소리를 죽이고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삼 년 동안 몇 번이나 해온 일인데도, 매번 처음 하는 것처럼 손끝이 차가워졌다. 달빛이 밝아서 다행이었다. 등불을 켤 수 없으니 이 정도 조도가 필요했다.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니 구름 한 점 없이 맑아서, 달이 유난히 크고 하얗게 걸려 있었다. 이런 날은 일 년에 몇 번 없다. 나는 그걸 무슨 계시처럼 받아들이기로 했다. 뜰 구석, 오래된 벚나무 밑을 손으로 파헤쳤다. 흙이 손톱 밑으로 파고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장갑을 챙겨 나올 정신도 없었다. 이 시간에 누가 볼세라 서두르는 마음이 더 컸다. 흙은 밤이슬 때문에 축축했고, 손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그 서늘한 감촉이 오히려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어줬다. 삼 년째 이곳에 묻어둔 상자였다. 낡은 나무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힌지가 뻑뻑해서 손톱으로 억지로 밀어 젖혔다. 안에는 은화와 금화가 섞여 있었고, 몇 장의 서류도 함께 들어 있었다. 한성 외곽의 작은 공방과 관련된 소유권 증서였다. 그걸 보는 순간 문득 깨달았다. 나, 생각보다 준비를 많이 해왔구나. 동전을 손끝으로 한 번 쓸어봤다. 차갑고 묵직한 감촉이 손바닥에 남았다. 세 보지 않아도 대략 얼마나 되는지는 알고 있었다. 매달 조금씩, 어떤 달은 아예 넣지 못한 적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꾸역꾸역 채워온 숫자였다. 열여섯 살 때부터였다. 그때 처음으로 자수 솜씨를 인정받았다. 어머니가 우연히 내가 놓은 손수건 자수를 보고 "이 정도면 상단에 팔아도 되겠다"고 지나가듯 말한 게 시작이었다.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건 나뿐이었을 거다. 며칠을 밤새워 손수건 몇 장을 더 놓았고, 그걸 몰래 상인에게 팔았다. 처음 받은 돈은 은화 두 냥. 지금 생각하면 별것도 아닌데, 그때는 손이 떨렸다. 처음엔 소소한 용돈벌이였다. 그런데 그게 쌓이고 쌓여서 지금은 작은 공방 하나를 소유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자수만으로는 부족해서 나중엔 몇몇 상인들과 거래를 넓혔고, 계절마다 유행하는 옷감이나 장신구를 소량으로 사들여 되팔기도 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몸이 먼저 배웠다. 아니, 정확히는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친 결과였다. 왜 이런 걸 해왔을까. 스스로에게 묻자, 답은 명확했다. 이 집에서 나는 언제나 여분이었으니까. 리아가 아프면 내 옷을 리아에게 넘겨야 했다. 리아가 원하면 내 방을 내줘야 했다. 리아가 심심하면 내 시간을 내줘야 했다. 그게 당연한 거라고, 부모님은 항상 그렇게 말했다. "리아는 몸이 약하잖니. 네가 좀 참아." 그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셀 수도 없었다. 열 살 때 겨울, 새로 산 외투를 리아가 마음에 든다고 하자마자 별다른 설명도 없이 그 애 방으로 넘어갔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나는 그때 낡은 외투를 다시 걸치고 밖으로 나가야 했다. 춥다고 말했더니, 어머니는 "리아는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 나잖니"라고만 답했다. 처음엔 억울했다. 나이가 좀 더 들고 나서는 억울함마저 무뎌졌다. 열세 살쯤이었나. 억울해서 울던 밤이 몇 번이었는지 세는 것도 그만두었다. 울어도 바뀌는 게 없다는 걸 알아버린 나이였다. 그리고 그 무뎌진 자리에 다른 게 채워졌다. 계산. 어차피 이 집에서 뭔가를 기대해선 안 된다는 계산. 기대를 걸면 실망하고, 실망하면 아프고, 아픈 건 딱 질색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대를 접었다. 대신 다른 걸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조금씩, 조용히, 나만의 자산을 쌓아왔다. 부모님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리아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상단에 물건을 넘기고 받은 돈은 전부 이 상자에 모았고, 몇 년 전부터는 한성의 작은 공방 지분까지 사들였다. 공방 주인 아저씨는 내가 어린 나이에 그런 걸 물어보는 걸 이상하게 여겼지만, 결국엔 "너처럼 야무진 애는 흔치 않다"며 순순히 계약서를 써줬다. 왜 이렇게까지 했는지 물으면, 대답은 하나였다. 혹시라도 이 집에서 밀려나는 날이 온다면. 그날이 오늘일 줄은 몰랐지만. 상자를 다시 묻고 흙을 덮으며 나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개복치 인생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름 준비된 개복치였네. 흙을 덮은 자리를 손바닥으로 두어 번 두드려 평평하게 만들었다. 누가 봐도 파헤쳐진 흔적이 없도록. 이 작업을 삼 년 동안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어느 밤은 비가 와서 흙이 질척거렸고, 어느 밤은 벚꽃잎이 흩날려서 상자를 찾는 데 애를 먹기도 했다. 방으로 돌아와 서류를 다시 확인했다. 공방의 소유권, 몇몇 상인들과의 거래 내역, 그리고 얼마 안 되는 현금. 큰 부자는 아니지만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을 정도의 밑천이었다. 서류를 한 장씩 넘기며 다시 확인하는 손끝이 왠지 든든했다. 글자 하나하나가 다 내 손으로 만든 결과물이었다. 창밖 하늘이 슬슬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 뒤척인 몸이 무거웠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조금 가벼웠다. 눈이 뻑뻑하고 다리도 저렸는데, 그것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건 안도감이었다. 이상한 안도감이었다. 마치 시험 전날 밤새 문제집을 다 풀고 난 기분이랄까. 리아와 태오 사이의 미묘한 공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든, 나에겐 이미 다음 수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헛웃음이었다. 스스로가 안전지대를 만들어놓았다는 사실이 안도감을 주는 동시에, 그만큼 이 집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서류를 정리하고 서랍 안쪽 깊숙이 넣으면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이 집 딸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순간 이런 걸 파묻고 있지 않았을 텐데. 가족. 그 단어가 유난히 낯설게 느껴진 아침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보는데, 저 아래 정원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누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창틀에 붙어 조심스레 아래를 내려다보니, 낯익은 실루엣이 벚나무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리아였다. 저 애가 왜 이 시간에 여기까지. 하필이면 내가 상자를 파묻은 그 자리 근처에서, 리아는 뭔가를 찾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심장이 다시 한 번 쿵, 내려앉았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