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왕궁의 알현실은 상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웅장했다. 붉은 카펫은 내가 걸어온 인생의 어떤 길보다도 길게 이어졌고, 그 끝에는 국왕 이건우가 황금빛 옥좌에 앉아 있었다. 천장의 샹들리에가 반사하는 빛이 카펫 위로 쏟아지고, 그 빛 사이로 대신들의 시선이 창처럼 날아와 나와 형에게 꽂혔다. 실수하면 끝이다. 이건 튜토리얼도 아니고 세이브 포인트도 없는, 진짜 목숨과 가문의 명예가 걸린 판이었으니까.
나는 형과 함께 예를 갖춰 절을 올렸다. 무릎을 굽히는 그 짧은 순간에도 머릿속으로는 오늘 할 말을 몇 번이나 되짚었다. 어젯밤 형이 몇 번이고 짚어준 예법과, 혹시 몰라 스스로 중얼거리며 외운 문장들이 뒤섞여 입안에서 맴돌았다. 실수 한 번이면 목이 날아가는 세계에서, 대본 없이 임기응변으로 버텨야 한다는 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 새삼 실감이 났다.
"공작 영식과 영애가 오셨구나." 이건우 국왕의 목소리는 낮고 위엄이 있었다. 나이가 지긋했지만 눈빛만큼은 그 자리에 있던 젊은 신하들도 함부로 마주하지 못할 만큼 매서웠다. 옥좌 옆에 늘어선 대신들의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마저 그 눈빛 아래에서는 조심스러웠다. "짐이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전하, 소인은 그 이유를 여쭙고자 이렇게 뵙기를 청했습니다." 형이 먼저 나서서 말을 꺼냈다.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그 안에 담긴 긴장은 숨길 수 없었다. 형의 손끝이 옷자락을 살짝 움켜쥐고 있는 게 옆에서 보였다. 저 사람도 떨고 있구나. 나만 떨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가, 곧 더 불안해졌다. 형까지 떨 정도의 자리라면 대체 얼마나 위험한 판인 걸까.
"태자의 명예가 흔들리고 있다." 국왕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후작가와의 혼담을 파기하고, 신분이 낮은 영애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대신들이 계속 문제를 삼고 있다. 벌써 몇 주째다. 조회 때마다 이 얘기가 나오지 않는 날이 없다." 국왕은 옆에 선 대신 하나를 흘겨보며 덧붙였다. "이걸 잠재우려면, 태자가 예전의 단죄가 공정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은 공정하게 화해했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공정한 단죄였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단죄당한 사람을 다시 불러다 쓴다는 게 말이 되나. 이건 무슨 억울하게 잘린 목을 다시 붙여서 사형이 정당했다고 증언시키는 꼴 아닌가. 하지만 겉으로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표정 관리 하나는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확실히 늘었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전하, 감히 여쭙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녀가 그 자리에 서는 것이 과연 명예 회복에 도움이 될지 의문입니다. 이미 단죄받은 사람이 증인으로 나선다면, 오히려 이전의 단죄 자체가 억울했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백성들의 눈에는, 죄인을 다시 불러다 쓰는 왕실로 보일 위험이 있습니다." 최대한 예의를 갖춰 말했지만, 속으로는 이 논리가 통해라, 통해라, 하고 간절히 빌었다. 이 정도 논리면 먹히지 않을까. 나름 며칠 밤을 새워 짜낸 말이었으니까.
국왕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몇 초에 불과했지만 나에게는 몇 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알현실의 정적 속에서 내 심장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친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라고 생각할 여유마저 있었다는 게 스스로도 우스웠다.
"영애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국왕이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이게 통했나? 됐다! 이대로 끝인가? 아주 잠깐, 정말 잠깐 희망이라는 게 손에 잡힐 듯했다.
"하지만." 그 뒤에 붙은 한 마디가 모든 희망을 무너뜨렸다. "이미 태자가 공식적으로 영애를 증인으로 세우겠다고 대신들 앞에서 선언했다. 지금 이를 철회하면, 태자의 말이 또다시 뒤집혔다는 소리가 나올 것이고, 이는 태자의 입지를 더 흔들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이하준이 이미 공식적으로 선언했다니. 나와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그저 자신의 위기를 넘기려고 나를 마음대로 이용해놓은 거였다. 씨발. 이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국왕 앞에서 그런 말을 내뱉을 만큼 무모하지는 않았다. 대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걸로 그 욕설을 대신 삼켰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상했다. 저번에 그 자식이 나를 보며 웃던 그 표정, 뭔가 다 계획한 듯한 여유로운 낯빛. 그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사람 좋게 웃는 얼굴 뒤에 이런 계산이 깔려 있을 거라고는, 아무리 이 세계가 개연성 없는 전개로 가득 차 있다 해도 상상하지 못했다.
"전하, 그렇다면 최소한의 조건을 여쭙고 싶습니다." 형이 다시 나섰다. 형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조금 더 단단해졌다. "공작가는 이번 사안에 대해 정당한 보상과 협상을 요청합니다. 동생이 증인으로 나서는 대신, 공작가의 영지 관련 세금 조정과, 향후 태자 전하의 정략혼 관련 사안에서 공작가의 발언권을 보장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더불어 증언 이후 동생의 신변 안전을 위해 왕실 소속 경비대를 배속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나는 형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감탄했다. 역시 형이었다. 이 절박한 순간에도 협상 카드를 하나 더 얹는 그 배짱이 대단했다. 경비대 얘기는 나도 몰랐던 조건이었는데, 저렇게 즉석에서 끼워넣는 걸 보면 형은 이미 이 판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나보다 훨씬 어른이구나, 새삼 느꼈다.
국왕은 형을 잠시 응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조건이라면 검토할 수 있다. 세금 조정과 발언권, 경비대 배속까지 모두 대신들과 논의해 결정하겠다. 하지만 소환 자체는 철회할 수 없다. 이건 이미 공식화된 사안이다. 왕의 말도, 태자의 말도, 한 번 뒤집히면 그 값이 곱절로 치솟는 법이다."
결국 철회는 불가능했다. 협상 카드는 조건을 조금 개선하는 데 그쳤을 뿐, 근본적인 문제—내가 왕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나는 알현실을 나서며 하늘이 노래지는 걸 느꼈다. 이런 게 절망이라는 감정인가 보다, 라고 스스로 진단했지만, 그 진단이 상황을 나아지게 만들지는 못했다. 진단이 병을 낫게 해주는 건 아니라는 걸, 나는 이 순간 제대로 깨달았다.
"아린아." 형이 낮게 불렀다. 복도로 나서자마자 형은 주위를 한번 살피고 목소리를 낮췄다. "이대로는 안 된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이하준 그놈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였는지도 알아내야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당장은 떠오르지 않았다. 협상은 결렬됐고, 왕명은 유효했으며, 나는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야 하는 처지였다. 게임 종료는 착각이었다는 걸 이제는 뼈저리게 실감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숨겨진 2부가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다. 그것도 하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궁정 암투 장르로.
알현실을 나서는 복도에서 나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대리석 바닥에 내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저 멀리, 회랑 끝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살갗이 따끔거리는, 분명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확신이 드는 종류의 시선이었다. 고개를 돌려 살펴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저 기둥과 그림자뿐이었는데, 그 짧은 순간의 위화감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림자가 유독 진하다 싶은 그 기둥 하나가 자꾸만 눈에 걸렸다.
"왜 그러니." 형이 물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나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방금 그 시선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 왕궁에는 내가 아는 인물들 외에도 뭔가 다른 존재가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태자도, 국왕도, 대신들도 아닌 제3의 시선이라니. 이 판에 아직 등장하지 않은 변수가 하나 더 있다는 뜻인가. 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눈앞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렇게 애써 걸음을 옮기면서도, 나는 등 뒤로 그 시선이 여전히 나를 따라오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