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죽은 성녀, 돌아왔습니다

5화

다음 날 아침, 마을 광장에는 벌써부터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바람이 유독 차가웠다. 먼지 냄새와 마른 풀 냄새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사람들의 목소리에는 하나같이 물기가 배어 있었다. "곽두칠 패거리가 다시 나타났대." 한 사내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주변을 두어 번 살피고 나서야 입을 여는 모습이, 그 이름 자체가 이곳에서 얼마나 무거운지를 짐작케 했다. "세곡 창고를 통째로 털어갈 거라던데." 다른 여인이 아이를 품에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엄마의 옷깃을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그 이름을 처음 들었지만, 사람들의 표정만으로도 그가 어떤 존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두려움과 무기력함이 뒤섞인 얼굴들이었다. 눈동자는 흔들렸지만, 발은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움직이지 않았다. 싸울 생각조차 하지 않는 얼굴들이었다. "국경 수비대는 뭘 하는 겁니까." 내가 물었다. 노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주름진 얼굴 위로 그늘이 스쳤다. "수비대는 삼 년 전에 반쪽만 남고 왕도로 불려 갔소. 여긴 버려진 땅이나 마찬가지요." 노인의 목소리에는 원망도, 기대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에 포기한 사람의 말투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이렇게 무기력한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머릿속에 새겨두었다. 국경을 방치한 왕궁의 책임이 여기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세금은 걷어가면서, 지켜줄 손은 절반만 남겨두고 떠난 셈이었다. 이런 곳에서 사람이 무기력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왕궁의 무능이 이렇게 사람들을 짓밟는구나.' 가슴 한편이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나는 그 열기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은 분노보다 관찰이 먼저였다. 해가 기울 무렵, 마을 어귀에서 다시 그 낯선 남자들이 나타났다. 어제 우리를 지켜보던 그 셋이 아니라, 이번엔 스무 명 가까운 무리였다. 먼지를 일으키며 걸어오는 발소리가 땅을 타고 울렸다. 선두에 선 남자가 두꺼운 도끼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피부가 거칠고, 눈가에 흉터가 깊게 나 있었다. 옷자락은 여기저기 해져 있었지만, 몸에 두른 가죽 갑옷만은 손질이 잘 되어 있었다. 무기에는 돈을 쓰지만 몸치장에는 무관심한 자의 흔적이었다. '저자가 곽두칠인가.' 분위기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부하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 그 걸음걸이의 무게, 눈빛 하나에도 실려 있는 위압감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세곡 창고 열쇠, 오늘 안 내놓으면 마을 하나 통째로 태워버린다." 곽두칠이 걸걸한 목소리로 외쳤다. 목소리가 광장 전체를 압도했다. 마을 사람들이 뒷걸음질 쳤다. 몇몇은 아예 등을 돌려 도망칠 자세를 취했다. 창고를 지키던 몇몇 청년이 낫과 몽둥이를 들고 나섰지만, 상대가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손에 든 무기가 파르르 떨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까마귀는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서 있었다. 나서지 않고 지켜보는 태도였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그 얼굴이, 오히려 더 신경을 긁었다. '왜 움직이지 않지.' 나는 그를 향해 낮게 물었다. "도와주지 않을 겁니까." "이건 네가 판단할 일이야." 짧은 답이었다. 그 눈빛에는 흥미도, 걱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저 관찰자의 시선일 뿐이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곧 이해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가 그에게는 시험대인 셈이었다. '좋다. 보여주겠다.' 이를 악물며 나는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을 청년들 앞을 가로막고 서서, 곽두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유하연 님, 위험합니다!" 노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곽두칠이 나를 훑어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턱을 치켜들고, 눈으로 내 몸을 위아래로 훑는 그 시선이 불쾌했다. "이건 또 뭔 계집이야. 얼굴은 예쁘장한데, 죽을 자린 못 알아보나?" 부하들 사이에서 낮은 웃음이 터졌다. 비웃음이 그들 사이를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세곡 창고는 이 마을 사람들의 겨울 양식입니다." 내가 담담하게 말했다.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도록 애를 썼다. "그걸 빼앗아 가면, 이 사람들은 굶어 죽습니다." "그게 나랑 뭔 상관이야?" 곽두칠이 도끼를 고쳐 잡으며 다가섰다. 땅을 밟는 발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손목에 남은 굳은살이 눈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무거운 무기를 다뤄온 흔적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두껍고, 손등에는 오래된 상처 자국이 여러 개 겹쳐 있었다. 다만 자세가 지나치게 크게 흔들렸다. 무게 중심을 다루는 방식이 투박했다. 힘은 있지만, 정제된 훈련을 받은 자는 아니었다. 기세로 밀어붙이는 데 익숙할 뿐, 정통으로 검이나 창을 배운 흔적은 없었다. '상대할 만하다.' 나는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물론 저 뒤에 도열한 스무 명은 별개의 문제였다. "비켜라. 그러면 목숨은 살려주지." 곽두칠이 도끼를 치켜들었다. 날 끝에서 저녁 햇살이 번뜩였다. 뒤에 있던 마을 청년들이 숨을 삼켰다. 숨소리조차 죽인 정적이 광장을 뒤덮었다. 나는 신성력을 완전히 봉인한 채, 순수하게 몸의 감각만으로 그의 움직임을 계산했다. '도끼는 무겁다. 궤적이 크고 느리다.' 무거운 무기일수록 궤도를 바꾸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건 상식이었다. 그가 도끼를 내리치는 순간, 나는 왼쪽으로 반보 물러서며 그의 팔을 스치듯 피했다.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곽두칠의 눈이 커졌다. "이 계집이……!" 그가 다시 도끼를 들어 올리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내 발이 그의 무릎 안쪽을 걷어찼다. 중심이 무너진 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땅이 울릴 정도로 무거운 소리가 났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방금까지 도망칠 자세를 취하던 청년들의 눈빛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이년, 계집치고 제법이구나." 곽두칠이 이를 갈며 다시 일어섰다. 눈가의 흉터가 씰룩거렸다. 뒤에 서 있던 부하들이 일제히 무기를 치켜들었다. 스무 명에 가까운 인원이 한꺼번에 달려들 태세였다. 칼과 창, 몽둥이가 뒤섞인 무기들이 저녁 햇살 아래서 흉물스럽게 빛났다. 나는 순간 숨을 참았다. '혼자서 저 수를 상대하는 건 무리다.' 곽두칠 하나라면 어렵지 않았지만, 스무 명이 동시에 달려드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마을 청년들의 낫과 몽둥이로는 절대 막을 수 없는 숫자였다. 그들이 도끼와 검 앞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채 몇 초도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곽두칠이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는 순간, 부하들의 발이 일제히 땅을 박찼다. 먼지가 확 일어나며 발소리가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나는 재빨리 손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 안쪽에서 희미한 온기가 요동쳤다. 신성력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그 익숙한 열기가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그것을 쓰는 순간, 나는 이서연이라는 진짜 정체를 절반쯤 드러내는 셈이었다. 성녀의 힘은 신성력을 다룰 줄 아는 자가 극히 드문 이 대륙에서, 누구든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흔적이었다. 뒤에서 까마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등에 꽂히는 느낌이 유독 무겁게 다가왔다. '선택은 이미 끝났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사람들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 어떤 판단도 의미가 없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나는 감싸 쥔 손을 천천히 펴기 시작했다. 손끝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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