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나는 선명 공작가의 장녀, 선하은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고 들었다. 마력 측정 수정이 내 손끝에서 단 한 번도 빛나지 않았다는 것을.
선연 성왕국에서 마력은 곧 신분이었다. 빛의 마력을 가진 자는 성직자가 되었고, 화염이나 대지의 마력을 가진 자는 기사가 되었다. 그리고 아무 마력도 없는 자는, 그저 껍데기로 취급받았다.
나는 그 껍데기였다.
공작저 안에서 나는 늘 뒷문으로 다녔다. 정문은 이복동생 선유나의 몫이었다. 선유나는 태어난 지 백일 만에 마력 측정 수정을 눈부시게 밝혔다고 했다. 성녀의 재림이라는 말이 왕궁 곳곳에서 돌았다.
나는 그 소문을 들을 때마다 가슴 한켠이 서늘해졌다.
정확히는, 서늘해진 게 아니라 실제로 차가워졌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얼어붙는 감각이었다. 어릴 때는 그게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되었다. 그건 감정이 아니라, 몸 안에 살아 있는 어떤 기운이었다.
처음 그 기운을 자각한 건 여섯 살 무렵이었다.
유나의 백일잔치에서 사람들이 아기의 손끝을 보며 환호하던 그날, 나는 구석에 서서 손에 쥐고 있던 유리잔을 무심코 내려다보았다. 잔 속의 물이 서서히 살얼음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그 잔을 얼른 치우고, 다시는 남 앞에서 무언가를 쥐지 않기로 했다.
나는 그것을 억누르는 법을 배웠다. 숨을 천천히 쉬고, 손끝에 힘을 빼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척하는 법을. 밤마다 이불 속에서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펴며 감각을 죽이는 연습을 했다. 그건 마법이 아니라 그냥 참는 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나는 방 안에서 홀로 앉아 있다가 물그릇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을 보았다. 아무도 없는 방이었다. 창문도 닫혀 있었다. 촛불 하나만이 흔들리고 있을 뿐, 바람 한 줌 들어올 구멍이 없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내 안의 냉기가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손끝이 하얗게 얼어 있었다. 감각이 없었다. 나는 그 손을 이불 속에 숨기고 밤새 잠들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마력이 없는 공작가의 장녀. 그것도 모자라 정체불명의 냉기를 몸에 지녔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나는 무능한 존재를 넘어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힐 것이었다. 이 왕국에서 빛이 아닌 것은 대개 어둠으로 분류되었고, 어둠은 곧 처형의 이유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존재를 지우며 살았다.
밥을 먹을 때도 소리를 내지 않았고, 걸을 때도 발소리를 죽였다. 하녀들은 내게 말을 걸지 않았고, 나 역시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공작저의 복도에서 나는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가는 존재였다.
식사 시간에도 나는 늘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았다. 유나의 접시에는 매끼 신전에서 보내온 성수가 곁들여졌고, 내 접시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게 당연했다. 나는 그 차이를 세는 것조차 그만둔 지 오래였다.
아버지, 선재현 공작은 나를 볼 때마다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실망도 아니었고 분노도 아니었다. 그냥 무관심이었다. 마력이 없는 딸에게 쏟을 감정이 애초에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가끔 아버지와 마주치면, 그는 잠깐 나를 보고는 곧 시선을 거뒀다. 마치 벽에 걸린 낡은 초상화를 지나치듯이.
'그래도 왕자님과의 혼약이 있으니까.'
나는 그렇게 되뇌며 하루를 버텼다. 제1왕자 이도현과의 정략혼약은 내가 이 가문에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명분이었다. 마력이 없어도, 왕비가 될 자리에 앉을 수만 있다면 공작가의 체면은 지켜지는 것이었다.
이도현을 마지막으로 본 건 반년 전, 왕궁 연회에서였다.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짧게 인사만 건넸다. 그 뒤로는 서신 한 장 오지 않았다. 혼약자라는 이름만 남고, 관계라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즈음 왕궁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국경 지대에서 용화제국과의 마찰이 잦아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용화제국은 얼음과 어둠의 마력을 숭배하는 적국으로, 선연 성왕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악의 제국'이라 불렸다. 빛의 신을 섬기는 우리와는 정반대의 신앙을 가진 나라였다.
그리고 국경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는 날이 갈수록 흉흉해졌다. 밤마다 얼어붙은 안개가 병사들의 진영을 덮친다는 이야기, 그 안개 속에서 그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 다만 그 모든 소문은 왕궁 깊숙한 곳까지 닿기 전에 흐려지곤 했다.
다만 이상한 건, 국경 마찰이 잦아질수록 왕궁 안에서 선유나의 존재감이 더욱 커졌다는 점이었다. 성녀의 힘이 국경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그녀는 매주 신전에 나가 축복의 의식을 치렀다. 그리고 그 의식이 있는 날마다, 이도현 왕자는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신전 계단을 나란히 내려오는 모습을 창문 너머로 본 적이 있었다. 유나의 웃음소리가 유리창을 넘어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순간에도 손끝이 살짝 시려오는 걸 느꼈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건 질투가 아니라고, 나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녀장이 다급한 얼굴로 내 방문을 두드렸다.
노크 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다급하고, 거칠었다.
"아가씨, 큰일 났어요."
나는 뜨개질감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뜨개바늘 끝이 손가락에 살짝 닿았는데, 그 부분이 유난히 차가웠다.
"무슨 일이지?"
시녀장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숨소리마저 고르지 못했다.
"유나 아가씨가... 위독하시대요."
나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위독하다니. 그 성녀가?'
그 순간 방 안의 촛불이 아주 잠깐, 파랗게 흔들렸다.
시녀장은 그 불빛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보았다. 촛불의 심지 끝이 얼어붙었다가, 다시 녹아내리는 그 짧은 순간을.
'왜 지금.'
몸속 깊은 곳에서 그 익숙한 냉기가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