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공작영애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나는 윤소하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신경 쓰면서도, 속으로는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개판인지를 필사적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뺨을 감싸고 있었지만, 이내 손을 내리고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빛에는 자존심 강한 사람 특유의 날카로움이 담겨 있었는데, 방금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니 완전히 괜찮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떨림을 숨기려고 턱을 더 빳빳하게 세우는 게, 어쩐지 남 얘기 같지 않아서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왕녀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어딘가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말에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존심을 세우려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그게 그녀의 방식이라는 것도 이해가 됐다. 뺨을 맞고도 눈물 한 방울 안 보이는 게 보통 사람이면 할 수 있는 일인가. 소설 속에서 몰락하는 악녀라는 설정과는 전혀 다른, 그저 억울하게 상황에 몰린 사람의 모습이었다. 원작에서는 이 여자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로 사형까지 당한다던데, 지금 보니 그 결말이 더 어이가 없게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무도회장의 분위기는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 수군거렸고, 몇몇은 나를 쳐다보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병약해서 늘 뒤에만 있던 왕녀가 왕자 앞에서 목소리를 높인 게 그들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부채로 입을 가린 부인들의 시선이 유독 따가웠는데, 저 시선 하나하나가 다 내일 아침 소문의 재료가 되겠구나 싶어서 속이 쓰렸다. 병약한 왕녀가 갑자기 저렇게 나댔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벌써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왕녀님, 이쪽으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금발 단발머리를 한 영애가 다가오고 있었다. 걸음걸이부터 군더더기가 없어서, 이 사람은 뭔가 훈련된 사람이라는 게 딱 느껴졌다. 나는 순간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을 더듬었는데, 제1기사단장 박도현의 딸, 박세아였다.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그런지 상황 판단이 남들과는 결이 달랐다.
"세아 영애, 무슨 일인가."
"제 아버지께서 이미 사태를 파악하고 오고 계십니다. 그전에 공작영애님을 별실로 옮기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곳에 계속 계시면 좋지 않은 소문에 계속 노출될 테니까요."
박세아의 판단력은 명확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연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럴 때 사람을 잘 만난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나는 이 순간 새삼 절감했다. 만약 이 자리에 판단력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윤소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저 청년들의 입방아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윤소하 공작영애님을 별실로 안내해주게. 세아 영애가 도와줄 걸세."
윤소하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미연과 박세아를 따라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는데, 그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몇몇 귀족 청년들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딱 봐도 술기운이 오른 얼굴들이었고, 저런 얼굴들은 판단력보다 우쭐함이 앞서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걸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윤소하 영애, 잠시 이야기 좀."
그중 한 명이 비웃음을 담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나는 그 목소리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의도를 읽었다. 이들은 분명 한미래 측 사람들, 그러니까 한미래를 지지하거나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무리들이었다. 문제는 그 잘 보이려는 마음이 지금 이 순간에는 남의 뺨을 후벼 파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한미래 영애를 그렇게 밀쳐놓고 뭘 그렇게 당당하게 걸어가시는지 모르겠군요."
다른 청년이 거들었다. 윤소하의 얼굴이 다시 굳어지는 게 보였다. 방금까지 겨우 버티고 있던 그 자존심의 균열이 다시 벌어지려는 게,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도 눈에 보일 정도였다. 나는 그 순간 발걸음을 옮겨 그들 사이로 다가갔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천천히,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걸었다. 이런 게 허세라는 감정인가 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두고 공작영애를 몰아세우는 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나는 최대한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년들이 나를 돌아보며 잠시 주춤했지만, 그중 한 명이 이내 비웃음을 흘렸다.
"왕녀님께서 갑자기 왜 이렇게 저 영애를 감싸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말투에는 명백한 적의가 섞여 있었다. 저건 단순한 술주정이 아니라 처음부터 계산된 시비였다. 나는 그 순간 이 사람들이 단순히 한미래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뭔가 다른 이유로 이 사건에 개입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소설 속 설정이 어렴풋이 다시 떠올랐다. 강태윤을 지지하는 파벌, 후궁 세력과 연결된 귀족 자제들. 이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윤소하를 완전히 몰락시키려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스쳤다. 그렇다면 오늘 뺨 한 번 맞은 걸로 끝날 사건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라니요. 다들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까."
또 다른 청년이 끼어들었다. 목소리에 취기가 묻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만만하게 볼 수는 없었다. 이런 술자리 시비가 다음 날 아침이면 소문이 되어 왕궁 곳곳으로 퍼지는 법이었으니까. 나는 속으로 욕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온화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본 것과 사실은 다를 수 있지요. 게다가 이 자리는 조사가 이뤄질 자리도 아니고, 여러분이 판결을 내릴 자리도 아닙니다."
"이서연 왕녀님."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도회장 입구 쪽에서 갑주를 갖춘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발소리 하나에도 무게가 실려 있어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저절로 길을 터주는 게 보였다. 박도현. 제1기사단장이자 박세아의 아버지였다. 그의 등장에 청년들이 순간 얼어붙었고,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반가운 등장은 살면서 몇 번이나 있을까.
"단장님."
"국왕 전하께서 무도회장의 소란을 보고받으시고, 신속히 상황을 정리하라 명하셨습니다."
박도현의 목소리는 낮고 무게감이 있었다. 그는 청년들을 한 번 훑어보더니, 짧게 명령했다.
"다들 자리로 돌아가시오. 이 일은 추후 조사가 있을 것이오."
청년들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감히 기사단장의 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물러났다. 뒤돌아서면서도 나를 한 번 흘겨보는 게, 저놈들 원한이 이걸로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이제야 좀 숨을 돌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박도현이 나에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왕녀님의 대처가 훌륭했다고 전하께 그대로 보고할 예정입니다."
나는 그 말에 순간 얼떨떨했다. 훌륭했다니, 나는 그저 계획이 무너진 걸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을 뿐인데.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질 정도였는데 그게 훌륭한 대처로 보였다니, 사람 보는 눈이라는 게 참 요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침착하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그저 왕실의 체면을 생각했을 뿐입니다."
박도현은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이 딸인 박세아와 어쩐지 닮아 있어서, 이런 부녀는 어디서든 믿음이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안도했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편했다. 강태윤은 아직 완전히 제압되지 않았고, 그가 이대로 순순히 물러설 리도 없었다. 오늘 일은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무도회장은 다시 서서히 원래의 소음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악단이 연주를 다시 시작했고, 몇몇 귀족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잔을 부딪치며 웃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 아래로 흐르는 긴장감은 여전히 팽팽했다. 오늘 밤 안에 이 무도회장에 있던 모든 사람의 입에서 이 이야기가 몇 번씩 각색되어 돌아다닐 게 뻔했다. 나는 그 소문의 방향이 최소한 윤소하를 완전히 짓밟는 쪽으로 흐르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무도회장 한쪽 구석, 커튼이 반쯤 걷힌 그늘 아래에서 누군가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나는 그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 시선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왜 이토록 조용히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는지는, 훗날 내가 훨씬 더 큰 위기에 빠졌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될 일이었다. 그 순간에는 그저 오늘 밤이 어떻게든 무사히 넘어갔다는 것에 안도하며, 다가올 폭풍의 크기를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채로 나는 무도회장의 불빛 속을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