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조 상궁의 시선이 나를 지나쳐 다음 사람으로 향했을 때, 나는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단순히 훑어본 것뿐이었나.'
옆에 선 다른 신입 시녀들의 얼굴을 슬쩍 살폈다.
다들 하나같이 고개를 숙인 채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었다.
'조 상궁이라는 이름이 그냥 나온 무게가 아니었구나.'
궁에 들어오기 전 들었던 소문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궁녀들 사이에서 조 상궁을 마주치면 세 걸음 뒤로 물러서서 인사한다는 말도 있었다.
그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너."
조 상궁이 다시 내 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시 돌아왔다. 왜.'
머릿속으로 빠르게 지난 며칠을 되짚었다.
수상한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말을 섞은 사람도 없었고, 눈에 띄는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조 상궁의 눈은 정확히 나를 짚어냈다.
"이름이 무엇이냐."
"아연이라 하옵니다."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답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배에 힘을 주었다.
조 상궁은 나를 위아래로 한 번 더 살폈다.
손, 자세, 시선의 방향까지.
손끝에 박인 굳은살의 위치를 확인하듯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이 여인은 관찰력이 예사롭지 않다.'
나는 속으로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평범한 시녀들을 상대하듯 넘길 상대가 아니다.'
"신원이 확실하지 않구나. 문서도 없고."
조 상궁이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숨을 한 번 고르고, 미리 준비해 둔 대답을 꺼냈다.
"부모를 여의고 떠돌다 왔사옵니다. 문서를 갖출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조 상궁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길게 느껴졌다.
숨소리마저 크게 들릴 것 같아, 나는 애써 호흡을 얕게 눌렀다.
"마침 잘 되었구나. 손이 하나 필요한 자리가 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조 상궁을 바라보았다.
그 말이 오히려 불길하게 들렸다.
"신원이 불확실한 자를 중요한 자리에 쓰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내 물음에 조 상궁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스쳤다.
그 웃음은 결코 다정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신원이 불확실할수록 좋은 자리다. 아무 연도, 아무 배경도 없어야 하니까."
나는 그 말의 뜻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자리를 말하는 것일까.'
'배경이 없어야 좋다는 자리라니, 그런 자리가 궁에 있었던가.'
조 상궁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나를 따라오라 손짓했다.
나는 다른 신입 시녀들과 떨어져 조 상궁을 따라 궁의 안쪽으로 걸어갔다.
뒤를 돌아보니, 남은 이들의 눈에 안도와 동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조금 뒤에야 알게 되었다.
회랑이 이어질수록 주변의 경계가 점점 엄중해졌다.
곳곳에 배치된 호위병의 수가 늘어났고, 문마다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호위병들의 갑주는 이제까지 본 것들과 결이 달랐다.
칼자루를 쥔 손의 위치, 시선을 놓치지 않는 각도.
'저들은 형식으로 서 있는 자들이 아니다.'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룻바닥이 유독 조용히 눌리는 것 같았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화려한 별채였다.
붉은 기둥과 금박을 입힌 창살, 그리고 그 앞을 지키는 두 명의 호위병.
기둥의 붉은 칠은 갓 손질한 듯 윤이 흘렀고, 창살의 금박은 빛을 받아 눈이 시릴 정도였다.
이만한 격을 갖춘 처소를, 나는 이 궁에 들어온 이래 본 적이 없었다.
"이곳은……"
"원래는 왕비의 침실로 지어진 곳이다."
조 상궁이 내 말을 가로채며 답했다.
나는 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소문이 사실이었다.'
들어오기 전, 저잣거리에서 스치듯 들었던 이야기가 머릿속에 스쳤다.
왕이 왕비의 자리를 비워둔 채 누군가를 그 자리에 앉혀두었다는 말.
허황된 소문이라 여기고 흘려들었던 그 말이, 눈앞의 붉은 기둥으로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왕비의 자리를 위해 지어진 곳에, 이미 다른 사람이 들어와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은 매우 귀한 손님께서 머물고 계신다. 앞으로 네가 그분을 전담해서 모셔야 한다."
"손님의 이름은……"
"유하람 님이시다."
조 상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름을 발음하는 그 순간, 조 상궁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이 이름 앞에서, 조 상궁조차도 조심스러워진다.'
그 반응 하나만으로도, 이 사람이 결코 평범한 손님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묻지 말아야 할 것은 묻지 않는 것이 이곳의 규칙이다. 그분의 과거도, 그분이 이곳에 계신 이유도 묻지 마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수십 가지 질문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왜 왕비의 처소에, 왕비가 아닌 이가 들어와 있는가.
왜 신원 없는 나 같은 자를 굳이 그 곁에 붙이려 하는가.
이 두 가지 질문만으로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조 상궁이 문을 열자, 나는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문틀을 넘는 순간, 짙은 향내가 코끝을 스쳤다.
값비싼 향이었으나, 어딘가 억지스럽게 밀어붙인 향처럼 과했다.
방 안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했다.
비단 이불, 자개로 장식된 가구, 그리고 곳곳에 쌓인 선물 상자들.
족히 수십 개는 되어 보이는 상자들이 방의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색색의 비단 끈으로 묶인 상자, 옥으로 만든 장식이 달린 상자, 금박이 둘러진 상자까지.
하나같이 최고급의 재료로 만들어진 것들이었으나, 그 화려함이 오히려 방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이것이 집착이라 불리는 것의 실체인가.'
나는 그 상자들을 보며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방 한가운데, 창가에 앉은 여인이 있었다.
검은 머리가 허리까지 길게 흘러내렸고, 피부는 창백할 정도로 희었다.
옷차림은 궁의 격식에 맞춰 갖춰져 있었으나, 정작 그것을 걸친 몸은 옷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큰 눈이 나를 향해 돌아왔을 때, 나는 그 눈빛에서 짙은 두려움을 읽어냈다.
'저 눈빛은 가짜가 아니다.'
두려움을 꾸며내는 사람의 눈은 어딘가 흔들리기 마련인데, 이 여인의 눈은 오히려 지나치게 고정되어 있었다.
'너무 오래, 너무 많은 두려움을 삼켜온 눈이다.'
그녀는 몸을 움츠리며 나를 경계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이불자락을 움켜쥐는 것이 보였다.
"누구세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오늘부터 유하람 님을 모실 시녀 아연이라 하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유하람은 대답 없이 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경계와 함께, 이상하게도 익숙함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나를 아는 사람처럼 보고 있다.'
나는 그 느낌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우리는 분명 처음 만나는 사이였다.
그런데도 저 눈은 마치 오래전에 본 얼굴을 다시 마주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애써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유하람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은 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뒷모습이 유난히 작고 위태로워 보였다.
가느다란 어깨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도 흔들릴 것 같았다.
'이 여인이 정말 왕의 마음을 흔든 존재란 말인가.'
나는 그녀를 관찰하며 속으로 되물었다.
소문 속의 위협적인 여인이 아니라, 오히려 보호가 필요한 사람처럼 보였다.
궁에 들어오기 전 들었던 이야기와 눈앞의 실체가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낯설었다.
방을 나서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옆에 쌓인 상자를 슬쩍 눈에 담았다.
포장을 풀지 않은 상자가 대부분이었다.
끈이 한 번도 풀린 적 없이 처음 매어진 그대로 놓여 있었고, 먼지가 살짝 앉은 것도 눈에 띄었다.
'받고도 열어보지 않았다.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왕의 집착과 그녀의 무관심.
그 어긋난 온도 차가 이 사건의 핵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쪽은 넘칠 듯 쏟아붓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받을 자리조차 마련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관계가 오래 유지될 수 있을지, 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첫날의 임무를 마쳤다.
방을 나서며 조 상궁에게 몇 가지를 더 묻고 싶었으나, 그녀는 이미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뒷모습에서도 더 이상의 질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밤이 깊어지며, 별채 주변의 공기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느끼지 못했다.
복도 끝에서 낮게 오가는 발소리와, 평소와 다른 호위병들의 배치가 무엇을 예고하는지도,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