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정혼자가 딴 여자에 미쳤다니

3화

국경 근처의 작은 객잔에서 나는 하늬와 마주 앉아 있었다. 창밖은 이미 어두웠고, 등불 하나가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기름 냄새가 옅게 코를 스쳤고, 심지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객잔 아래층에서 술 취한 상인들의 웃음소리가 간간이 올라왔지만, 이 방 안의 공기는 그것과는 다른 무게로 가라앉아 있었다. "계획을 정리하자." 나는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낡은 종이 위에 국경부터 왕궁까지 이어지는 길이 붉은 먹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왕녀로서의 입궁은 예정대로 사흘 후야. 그전에 내가 먼저 평민 신분으로 잠입해야 해." 하늬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한 냉정함이 담겨 있었다. "그럼 그동안 왕녀 역할은 누가 합니까."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결국 솔직하게 답했다. "네가 해야 해." 하늬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제가요? 저는 시녀 신분입니다. 왕녀의 예법을 흉내 내는 것과, 진짜로 그 자리를 감당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평소의 담담한 말투와는 다른, 진짜 당혹감이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알아. 하지만 너 말고는 믿을 사람이 없어."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공식 행렬은 이미 준비되어 있어. 얼굴을 마주할 대현국 측 인사도 아직 없고. 며칠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야." '하늬라면 해낼 수 있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보여준 침착함과 눈치, 그리고 나를 향한 충심을 생각하면, 이보다 나은 선택은 없었다. 하늬는 한참 침묵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순간, 그녀의 입술이 살짝 굳게 다물어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위험한 순간이 오면 바로 저를 부르셔야 합니다." "그럴게." 나는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이 얼마나 어색했는지, 나조차도 알 수 있었다. 웃음 뒤에 남은 침묵 속에서, 하늬는 아무 말 없이 지도 위의 붉은 선을 손끝으로 따라 그렸다. 마치 그 길을 몸으로 미리 걸어보려는 것처럼. 다음 날, 나는 평민 여인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거친 무명천의 감촉이 몸에 낯설게 감겼다. 비단에 익숙해진 손끝이 그 거친 질감을 이질적으로 느꼈다. 옷깃이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따갑게 쓸리는 느낌이 들었고, 소매 끝은 손목을 헐렁하게 흘러내렸다. '이제부터는 왕녀가 아니다.' 나는 거울 속의 낯선 여인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머리카락도 단정하게 틀어 올리지 않고, 아무렇게나 묶어 늘어뜨렸다. 이름도 새로 지었다. '수아'라는 이름의 흔적을 지우고, '아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입 안에서 그 이름을 몇 번 굴려보았다. 낯설었지만, 곧 익숙해져야 할 이름이었다. 하늬는 왕녀의 예복을 입고, 나 대신 공식 행렬에 올랐다. 예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등을 곧게 펴고, 턱을 살짝 들어 올린 자세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왕녀처럼 보였다. 먼저 떠나는 그녀의 마차를 배웅하며, 나는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마차 바퀴가 흙길을 구르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고,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저 아이가 나를 대신해 위험을 짊어지고 있다.' 나는 그 사실을 잊지 않기로 했다. 나는 상인들의 짐마차에 몸을 숨겨 국경을 넘었다. 짐칸 사이에서 나는 숨소리를 죽이며 몇 시간을 견뎌야 했다. 마차 바닥의 나무판 사이로 흙먼지가 올라와 코를 찔렀다. 짐칸에 실린 곡식 자루들이 흔들릴 때마다 등에 부딪혔고, 그 무게에 몸이 짓눌리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바퀴가 돌부리에 걸릴 때마다 온몸이 튀어 올랐고,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귓속에 울렸다. '이것이 백성들이 느끼는 여정이구나.' 나는 처음으로 그 불편함을 몸으로 알게 되었다. 궁에서 마차를 타고 이동할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피로였다. 왕궁의 후문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미 다리가 뻐근해질 정도로 지쳐 있었다. 짐칸에서 내려서는 순간 무릎이 휘청거렸고, 나는 손으로 마차 바퀴를 짚어 몸을 지탱해야 했다. 후문 앞에는 왕궁의 하급 관리들이 신입 시녀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붙어 있었다. '이건 하늘이 준 기회다.' 나는 곧바로 그 앞에 줄을 섰다. 앞에 선 여인들은 모두 지방에서 올라온 가난한 집안의 딸들이었다. 헐벗은 손, 닳은 신발, 그리고 눈에 담긴 불안. 한 여인의 손등에는 겨울 추위에 갈라진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또 다른 여인의 신발 밑창은 이미 반쪽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 그들 사이에 섞여 서 있으니, 나 역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고, 해가 조금씩 기울어가는 동안 사람들의 발끝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관리가 내 앞에 다가와 위아래를 훑었다. 그 눈길은 무심했지만, 동시에 빠르게 나를 스캔하듯 지나갔다. "이름은?" "아연이라 하옵니다." "출신은?" 나는 미리 준비해 둔 대답을 내놓았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나는 숨을 한 번 삼키고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먼 지방에서 왔사옵니다. 부모를 여의고 홀로 지내다, 궁에서 일할 자리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관리는 별다른 의심 없이 내 이름을 명단에 적었다. 붓끝이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렇게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나.' 나는 안도와 동시에 어딘가 허탈함을 느꼈다. 한 나라의 심장부라는 곳이, 이렇게 허술하게 사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왕녀로 자랐을 때는 몰랐던 것들이 이렇게 많구나.' 나는 그 생각을 마음 한편에 접어두었다. 나는 다른 신입 시녀들과 함께 궁의 내부로 이끌려 들어갔다. 돌담 사이로 이어진 좁은 회랑을 지나며, 나는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호위병의 배치, 문의 위치, 사람들의 발걸음 속도. 회랑의 모퉁이마다 호위병이 한 명씩 서 있었고, 그들의 시선은 지루한 듯 흐트러져 있었다. '경계가 생각보다 느슨하다.' 이것도 하나의 정보였다. 모든 것이 정보였다. '이곳이 도재헌의 궁이다.' 나는 그 사실을 새기며 걸음을 옮겼다. 돌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발끝을 타고 스며들었다. 회랑 끝에서, 마흔 후반쯤의 여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와, 흐트러짐 없는 자세. 그녀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팽팽해지는 느낌이었다. 한눈에도 이 궁의 질서를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 상궁이십니다. 앞으로 여러분을 관리하실 분이니 예를 갖추어라." 인솔자의 말에 신입 시녀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나 역시 다른 이들과 다름없이 허리를 굽혔지만, 속으로는 그녀의 얼굴 하나하나를 눈에 새기고 있었다. 조 상궁의 시선이 줄지어 선 우리를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그 눈길은 마치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고르듯 냉정했다. 그 시선이 내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숨을 죽이며 그 시선을 견뎌냈다. 내 손끝이 아직 비단의 감촉을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 걸음걸이에서 어딘가 왕녀의 습관이 배어 나온 건 아닐까. 수많은 생각이 짧은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조 상궁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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