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웃으며 벼리는 칼날

4화

며칠이 지나도록 채원은 겉으로 아무런 티를 내지 않았다. 아침이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헌의 조복을 정리했고, 저녁이면 그가 늦게 돌아오는 것을 탓하지 않고 물수건을 대어주었다. 이헌 앞에서는 여전히 순종적인 아내였고, 소이 앞에서는 여전히 말이 없는 정실이었다. 겉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방문을 닫고 홀로 있을 때, 채원의 머릿속은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밥상을 물릴 때도, 바느질을 할 때도, 심지어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아도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유서방이라는 사람을 찾아야 해.' 채원은 생각했다. '그 사람이 소이의 배후에 있는 자라면, 그자를 캐는 것이 곧 소이의 진짜 얼굴을 캐는 길이다.' 그것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지금 당장, 이 집에서 밀려날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 여섯 해를 이 집 안주인으로 살았지만, 그 여섯 해가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채원은 이제 알았다. 소이가 들어온 뒤로 안채의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었고, 종들의 눈빛도 예전 같지 않았다. 누구를 향해 허리를 굽히는지, 채원은 요즘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 채원은 혼수로 가져온 물건들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육 년 전 시집을 때 가져온 함들 중 일부는 아직 열어보지도 않은 채 창고 깊숙이 처박혀 있었다. 시집온 뒤로 한 번도 꺼내볼 일이 없던 것들이었다. 먼지를 털어내는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뚜껑을 열 때마다 예전 냄새가, 어머니 집의 냄새가 희미하게 올라왔다. 패물함 몇 개, 옷감을 넣어둔 궤, 그리고 손도 대지 않았던 작은 자개함까지. 채원은 하나씩 열어 안을 확인했다. 대부분은 오래되어 색이 바랬거나, 이제는 유행이 지난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중 하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겨준 자개함을 열었을 때, 채원은 잠시 손을 멈췄다. 함 안에는 패물 몇 점과 함께, 어머니가 생전에 써둔 서찰 한 장이 접혀 있었다. 종이는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접힌 자국마다 색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얼마나 오래 그 자리에 놓여 있었는지 짐작케 하는 흔적이었다. 채원은 조심스럽게 종이를 펴 들었다. 어머니의 필체는 여전히 단정했다. "딸아. 혼인이란 것은 결국 두 집안의 셈이다. 지아비 하나에게만 목을 매지 말고, 네 편이 되어줄 사람을 항상 여럿 두어라." 채원은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처음 시집올 때 이 서찰을 받았을 땐, 그저 어른들의 흔한 당부처럼 여기고 넘겼던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 말이 이렇게 무겁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지만, 그 말은 지금 이 순간 채원에게 가장 절실한 조언이었다. 채원은 서찰을 접어 다시 함 안에 넣지 않았다. 대신 저고리 안쪽, 심장 가까운 자리에 품었다. 종이가 가슴에 닿는 감촉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다잡게 만들었다. *** 다음 날, 채원은 방씨를 불러 조용히 일렀다. 방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창밖에 인기척이 없는지도 한 번 더 확인한 뒤였다. "방씨 어머니. 제가 시집을 때 데려온 종들 중에, 지금도 진심으로 저를 따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방씨는 그 질문의 무게를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채원이 태어날 때부터 그 곁을 지켜온 사람다운 반응이었다. "아씨. 설마..." "묻는 말에만 답해주세요." 방씨는 한숨을 삼키고 손가락을 접으며 셈했다. 하나, 둘, 셋. 손가락을 다 접고 나서도 한참을 더 헤아리는 척했지만, 늘어날 숫자는 없었다. "몸종 하나, 마부 하나, 그리고 저까지 셋입니다요. 나머지는 이미 이 댁 사람이 되었지요." 여섯 해 전에는 열을 넘게 데려온 사람들이었다. 그중 셋이라니. 채원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얼굴에는 드러내지 않았다. "셋이면 충분해요." 채원이 낮게 말했다. "당분간은 아무도 모르게, 그 셋만 조용히 제 편으로 묶어두세요." "아씨, 무슨 일을 벌이시려고..." "아직은 저도 몰라요." 채원은 정직하게 답했다. "하지만 아무 준비도 없이 당하고 싶지는 않아요." 방씨의 눈에 걱정이 스쳤지만, 곧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채원이 태어날 때부터 지켜본 사람이었다. 강보에 싸인 아기 때부터, 혼례를 올릴 때, 그리고 지금까지. 그 세월 동안 이 아이가 이렇게 눈빛을 굳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알겠습니다요." 방씨는 낮게 대답했다. "그런데 아씨, 그 셋만으로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면 돼요." 채원은 담담히 말했다. "몸종에게는 소이 처소의 움직임을 살피게 하고, 마부에게는 밖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눈여겨보게 하세요. 어머니는... 저와 함께 있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방씨는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문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이 평소보다 무거워 보였다. *** 그날 밤, 채원은 자개함을 다시 닫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어머니. 저는 아직 무엇을 해야 할지 다 알지 못해요.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무너지지는 않을 거예요." 창밖으로 바람이 지나가며 문풍지가 가늘게 떨렸다. 그 소리가 마치 대답처럼 들렸다. 채원은 저고리 안쪽에 품은 서찰을 손끝으로 한 번 더 만졌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살짝 깼다. 이 집에 시집온 지 여섯 해. 그동안 채원은 늘 참고, 견디고, 물러서는 쪽을 택해왔다. 그것이 정실의 도리라고 배웠고,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채원은 눈을 감고 다짐했다. 유서방이라는 자를 찾는 것, 그것이 다음 걸음이었다. 그자가 누구인지, 소이와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이 집안에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하나씩 캐내야 했다. 그리고 그 걸음이 자신을 얼마나 위험한 곳으로 이끌지, 채원은 아직 알지 못했다. 방 안의 등잔불이 흔들리며 벽에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그림자는 마치 채원의 앞에 놓인 길처럼,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게 굽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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