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웃으며 벼리는 칼날

3화

다음 날 아침, 채원은 유모인 방씨의 손을 붙잡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조반을 마쳤다. 숭늉 한 그릇을 다 비우고서도 채원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방씨는 그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밥그릇을 물리는 손짓 하나, 젓가락을 내려놓는 속도 하나까지, 방씨의 눈에는 죄다 이상하게만 보였다. 방씨는 채원이 태어날 때부터 곁을 지킨 사람이었다. 갓난쟁이 시절부터 재워 온 아이였으니, 채원이 아무리 태연한 얼굴을 꾸며도 그 속을 못 읽을 리가 없었다. 그녀만은 채원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어긋나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씨." 방씨가 낮게 불렀다. "밤새 한숨도 못 자셨지요." 채원은 대답 대신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반듯해서, 방씨는 오히려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사람이 진짜로 괜찮으면 저렇게 정교하게 웃지 않는 법이었다. 저건 연습한 웃음이었다. "제가 아씨를 몇 년을 모셨는데, 그 웃음이 진짠지 가짠지 모를까요." "방씨 어머니는 참 눈치가 빠르시네요." 채원이 슬쩍 눙치듯 말했다. "눙치지 마시고요." 채원은 잠시 숟가락 끝으로 밥그릇 테두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다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방씨 어머니." 채원이 물었다. "소이 아가씨가 이 댁에 드나든 지 벌써 몇 달째지요?" 방씨는 뜬금없는 질문에 눈을 껌벅였다. "석 달쯤 되었을 겁니다요." 방씨가 손가락을 접으며 셈했다. "그런데 어찌 그런 걸 물으십니까." "그냥요." 채원이 짧게 답했다. 하지만 그 짧은 대답 뒤에 무언가를 캐려는 눈빛이 숨어 있었다. 방씨는 그 눈빛을 보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씨가 저런 눈을 할 때는, 언제나 뒤가 있었다. 어릴 때도 그랬다. 저 조용한 눈빛 뒤에서 몰래 담을 넘어가 옆집 개를 풀어놓기도 했고, 서당 훈장 몰래 책을 바꿔놓기도 했다.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심각한 일이었지만, 눈빛만은 그때 그대로였다. "아씨, 또 무슨 일을 벌이시려는 겁니까." "아무 일도 아니에요." 채원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끝을 흐렸다. "그냥 좀 확인할 게 있어서." *** 채원은 그날 오후, 뒷마당 우물가에서 우연히 침선방 몸종 하나와 마주쳤다. 소이의 처소 일을 거드는 아이였다. 우물가에는 볕이 유난히 뜨거웠다. 아이는 물동이를 이고 낑낑대며 걸어오다 채원과 마주치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조아렸다. "저기." 채원이 슬쩍 다가가 물었다. "소이 아가씨 처소에 요즘 손님이 자주 드나든다고 들었는데, 맞느냐?" 몸종은 눈을 크게 뜨더니 고개를 숙였다. "저는... 잘 모릅니다요, 아씨." 뻔한 거짓말이었다.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리는 것부터가 그랬다. 채원은 그 아이의 손에 작은 은가락지 하나를 슬쩍 쥐여 주었다. "괜찮다. 나쁜 뜻으로 묻는 게 아니니." 몸종은 손안의 은가락지를 내려다보더니, 다시 채원의 얼굴을 살폈다. 채원의 표정에는 협박도, 다그침도 없었다. 그저 담담한 궁금함뿐이었다. 그게 오히려 몸종의 마음을 흔들었다. "...정말 아무한테도 말 안 하실 거지요?" "약속하마." 몸종은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입을 열었다. "이레 전에 유서방이라는 사람이 다녀갔습니다. 밤늦게 몰래 뒷문으로 들어왔다가, 새벽닭이 울기 전에 나갔습니다요." "밤에?" 채원이 되물었다. "왜 하필 밤에 온다는 것이냐." "저야 모르지요. 그런데 그날 이후로 서방님께서 요즘 하시는 말씀들이... 다 그 사람이 일러준 거라던데요." 채원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이헌이 하는 말이 누군가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그건 이헌의 진심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나쁜 뜻일 수도 있었다. "유서방이 누군데?" "모릅니다. 다만 소이 아가씨의 먼 친척이라고만 들었습니다. 말씨가 이 지방 사람 같지도 않고요." "이 지방 사람이 아니다?" 채원이 되짚었다. "어느 지방 말투이더냐." "그것까지는... 정말 모릅니다, 아씨. 저는 문틈으로 얼핏 목소리만 들었을 뿐이라." 몸종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애원하듯 말했다. "부디 이 이상은 묻지 말아 주십시오. 소이 아가씨께서 아시면 저는 그날로 쫓겨납니다." 채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섰다. 더 캐물어봐야 이 어린것의 목숨줄을 조이는 짓밖에 안 될 터였다. *** 채원은 그 밤, 이헌이 낮에 뱉었던 말을 다시 곱씹었다. "채원이 너는 강하니까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을 거다." 곱씹을수록 이상했다. 이헌은 원래 저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건 마치 누군가 종이에 적어 놓고 외우게 한 말투 같았다. 억양도, 쉼표를 찍는 자리도, 평소의 이헌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그 말이 이헌 본인의 생각이 아니라, 누군가가 미리 짜서 그의 입에 넣어준 대사였다면. '그렇다면 이건 그저 마음이 변한 게 아니라...' 채원은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그다음 문장을 완성하는 게 두려웠다. 설계. 그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열네 살 때의 일도, 지금의 일도, 어쩌면 처음부터 우연이 아니었던 게 아닐까. 유서방이라는 사람이 밤에만 몰래 드나든다는 것, 그리고 그 이후로 이헌의 말투가 바뀌었다는 것. 두 가지를 나란히 놓고 보니 소름이 돋았다. 채원은 촛불을 끄지 않은 채 밤을 새웠다. 방문 밖에서 방씨가 몇 번이나 기웃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문을 열어달라 청하지는 않았다. 아마 채원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채원의 머릿속은 오히려 더 맑아졌다. 두려움은 어느 순간부터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확인해야 한다는 조바심이었다. '유서방이 어디서 왔는지, 왜 밤에만 오는지, 그리고 소이와 정확히 무슨 관계인지.' 다음 날 아침, 눈 밑에 짙은 그늘이 생겼지만 그녀의 눈빛만은 전날보다 훨씬 또렷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또렷함 뒤에는, 아직 채원 자신도 그 끝을 짐작하지 못한 결심 하나가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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