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웃으며 벼리는 칼날

2화

채원의 기억은 열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두 집안 어른들이 마루에 앉아 사주단자를 주고받던 날, 채원은 마당 한구석에서 낯선 사내아이를 처음 보았다. 그날은 유난히 볕이 좋았다. 마루 위에는 붉은 보에 싸인 함이 놓여 있었고, 어른들은 낮은 목소리로 뭔가를 주고받으며 웃었다. 채원은 그 웃음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그저 마당 감나무 아래 서 있던 사내아이의 옷차림이 유독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서이헌은 그때도 눈빛이 유약했다. 다른 아이들과 싸우다가도 먼저 눈물을 보이는 쪽이었다. 실제로 채원이 처음 본 순간에도 이헌은 형에게 팔을 붙잡힌 채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쟤는 왜 저러고 있대.' 열 살의 채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저 애가 내 낭군이 된다고?' 실망이라기보다는 그저 낯선 기분이었다. 마치 새로 산 신발이 조금 큰 것을 신었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둘은 정말로 가까워졌다. 이헌은 채원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손목을 잡고 낚싯대 던지는 법을 알려주다가 둘 다 냇가에 빠진 적도 있었다. 채원은 이헌이 서당에서 혼날 때마다 대신 사정을 봐주었다. "제가 먼저 말을 걸었어요." 그 말을 몇 번이나 훈장 앞에서 했는지 셀 수 없었다. 그 시절엔 분명, 서로를 좋아했다. *** 그리고 열네 살이 되던 해, 첫 번째 배신이 있었다. 윤소이가 마을에 나타난 것이 그해 봄이었다. 몰락한 향반가의 딸이라던 그녀는 하얗고 가는 손목에 늘 앓는 기색을 달고 다녔다. 마을 아낙들은 그녀를 보며 "저러다 시집도 못 가고 죽겠네" 하고 수군거렸는데, 그럴 때마다 이헌이 약을 지어 나르곤 했다. 채원은 처음엔 그것을 선의로만 여겼다. 이헌은 원래 정이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병든 강아지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가을이 지나기 전, 소이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마을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우물가에서 물을 긷던 아낙들의 입방아가 채원의 집 담을 넘어왔다. 채원의 아버지는 파혼을 선언했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채원은 마당 끝에서도 또렷이 들었다. 채원은 그날 방문을 걸어 잠그고 사흘을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문 앞에서 밥그릇을 들고 몇 번을 두드렸는지, 채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벽을 보고 앉아 손톱만 물어뜯었다. 이헌은 그때도 울었다. 채원의 집 앞에 무릎을 꿇고 사흘 밤낮을 앉아 있었다고 했다. "내가 잘못했다. 미안하다, 채원아." 그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는지 셀 수 없었다. 결국 소이의 아이는 태어나지 못했다. 병으로 잃었다고 했다. 마을에는 다른 소문도 돌았지만, 채원은 굳이 그것을 캐묻지 않았다. 그리고 이헌의 집안은 채원의 집안에 백배 사죄하며 혼담을 다시 이어붙였다. 이헌의 어머니가 채원의 손을 잡고 울며 사죄하던 그 순간을, 채원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했다. '그때 나는 왜 다시 받아들였을까.' 채원은 스무 살이 넘어서까지도 종종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답은 간단했다. 그때는 이헌을 사랑했다. 그리고 사람은 사랑하는 이의 첫 잘못을 쉽게 용서한다. *** 그렇게 두 사람은 혼인했고, 육 년이 흘렀다. 혼례 날 이헌은 채원의 손을 잡고 "다시는 너를 울리지 않겠다"고 했다. 그 말을 채원은 오래도록 마음에 담고 살았다. 육 년 동안 소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녀의 이름은 점점 잊혀 갔다. 채원은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믿었다. 그랬는데. 올봄, 소이가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지아비를 잃고 홀로 된 처지라고 했다. 검은 상복을 입은 그녀가 마을 어귀에 나타난 날, 채원은 우연히 장터에서 그 모습을 보았다. 소이는 예전보다 더 야위었고, 눈빛만은 이상하게 또렷해져 있었다. 이헌은 옛 정을 잊지 못했다는 듯 다시 그녀의 곁을 맴돌기 시작했다. 처음엔 안부를 묻는 정도였다. 그다음엔 약을 지어다 주는 정도였다. 채원은 그 패턴이 낯설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채원은 그때부터 알았어야 했다. 사람은 같은 실수를 두 번 저지르는 법이 없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방금 이헌이 마루에서 뱉은 말이 채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채원이 너는 강하니까." 그 말을 뱉을 때 이헌은 채원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않았다. 시선은 마당 끝, 담장 너머 어딘가에 가 있었다. 열네 살의 채원이었다면 그 말을 듣고 무너졌을 것이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다시 사흘을 울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스물이 넘은 채원은 이제 다른 생각을 했다. '그 말은 어디서 나온 거지?' 채원은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이헌은 원래 그런 식으로 말을 정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늘 눈물부터 앞세우던 사내였다. 감정이 앞서서 말이 자꾸 끊기고, 무릎을 꿇고 빌면서도 정작 무엇을 잘못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쪽이었다. 그런데 오늘 마루에서 그가 뱉은 말들은 이상하게 매끄러웠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틈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 미리 써준 대본을 외운 것처럼. 누군가가 그에게 그 말을 가르쳐 준 것처럼, 문장이 지나치게 정돈되어 있었다. 채원은 마루 기둥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익숙한 불안이 다시 목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육 년 전에도 이랬다. 처음엔 그저 정이 많아서라고 여겼다가, 나중에는 배가 불러오는 것을 보고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에는 그 배가 무엇이 될지, 채원은 아직 알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건, 이헌의 입에서 나온 그 정돈된 말투 뒤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서 있다는 것이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