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친구라는 말의 정의를 새로 써야 한다면 나는 강서연을 예시로 들 것이다. 삼 년 동안 붙어 다닌 사이였고, 삼 년 동안 나는 그 애의 그림자로 사는 법을 배웠다. 정확히 말하면 배운 게 아니라 적응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적응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 방식이었으니까.
서연은 예뻤고, 인기가 많았고, 무엇보다 그 사실을 절대 잊지 않게 해주는 재주가 있었다. "은하야, 너 그 옷 어디서 샀어? 아, 나도 알아, 거기 좀 싸잖아." 이런 말들이 하루에 두세 번씩 날아왔고 나는 매번 웃으며 받아냈다. 웃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화를 냈다가는 "왜 그렇게 예민해"라는 말이 뒤따라올 게 뻔했고, 그 다음엔 서연의 무리에서 조용히 밀려나는 순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밀려나고 싶지 않았다. 밀려나면 혼자가 되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혼자가 된 애를 보는 다른 애들의 시선을 견디는 게 무서웠다.
이도현을 좋아한 것도 잘못이었다면 잘못이었다. 팔로워 삼십만 명짜리 얼굴, 구제 옷가게에서 알바하는 게 컨셉인 척하는 남자애. 브이로그에서는 낡은 셔츠를 입고 "이런 삶도 나름 낭만 있잖아요"라고 말했지만 그 삶의 낭만을 위해 매달 촬영 장비에 들어가는 돈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나는 그 애가 올리는 브이로그를 몰래 보고 좋아했다는 이유만으로 서연에게 빌미를 준 셈이 됐다. 좋아한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서연은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아니, 안다. 내 휴대폰 잠금 화면이 도현의 채널 로고였다는 걸 그 애가 봤을 것이다. 그게 전부였다.
"내가 먼저 말 걸어볼까? 너 대신?" 서연은 그렇게 물었고, 나는 고맙다고 했다. 그 순간에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첫 번째로 이상한 지점이었는데, 당시엔 이상함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한 달 뒤 둘은 커플이 되어 있었다. 서연은 미안하다는 말 한 번 없이 손을 잡고 다녔고 나는 그걸 지켜보는 게 일상이 됐다. 급식실에서, 복도에서, 심지어 내가 앉은 옆자리에서 둘이 붙어 있는 걸 몇 번이나 봐야 했는지 세는 걸 그만둔 지 오래였다. 화가 났느냐고 묻는다면, 화가 나는 감정보다 익숙해지는 감정이 더 빨랐다고 답하겠다. 익숙해진다는 건 어떤 의미로는 패배를 인정하는 거였고, 나는 매일 패배를 인정하며 등교했다.
그날도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6교시 자율학습 시간, 창밖으로 노을이 걸쭉하게 번지고 있었고 나는 문제집 구석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낙서라고 해봐야 별거 없는, 작은 별과 화살표 몇 개. 집중력이 남아나질 않았다. 옆자리 박태호는 여느 때처럼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애랑 대화를 나눈 기억이 손에 꼽는다. 지우개 좀 빌려달라, 이 문제 답이 뭐냐, 그 정도가 우리가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이도현이 시키는 심부름을 묵묵히 해내는 애, 라는 인상 말고는 별다른 게 없었다. 도현이 "태호야, 이거 좀"이라고 하면 태호는 두 마디도 없이 움직였다. 그게 친구 사이인지 아닌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남의 관계에 관심을 쏟을 여력이 나한테는 없었다.
빛이 번쩍인 건 그 순간이었다.
형광등이 터진 줄 알았다. 그런데 눈이 부신 감각이 사라지지 않았고, 발밑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고, 교실 바닥이 하얗게 지워지고 있었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누군가의 의자가 넘어가는 소리, 누군가의 짧은 숨소리, 그런 파편적인 감각들만 스쳐 지나갔다. 서연의 손이 도현의 팔을 붙잡는 걸 봤고, 태호가 눈을 뜨는 걸 봤고, 그다음은 없었다. 정확히는 없어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그 짧은 순간에 든 생각은 이거였다. 아, 문제집에 낙서한 거 지워야 하는데.
죽기 직전에도 사람은 참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대리석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차가웠다. 그리고 넓었다. 천장이 어디 있는지 가늠도 안 될 만큼 높은 홀이었고, 사방에서 낯선 언어가 들려왔다가 이내 익숙한 한국어로 바뀌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건 통역 마법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것도 있냐고 물었더니 그런 것도 있단다. 편리하다고 해야 할지, 무섭다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언어가 자동으로 번역된다는 건 이 세계가 나를 대상으로 이미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몸을 일으키려는데 손바닥이 시렸다. 대리석이 얼음장 같았다. 무릎도 얼얼했다. 아무래도 꽤 세게 떨어진 모양이었다. 코를 훌쩍이며 정신을 차리는 사이, 주변에서 소란이 시작됐다.
"성녀시여!"
누군가 외쳤다. 고개를 돌리니 서연이 은빛 빛무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머리카락이 바람도 없이 흩날렸고, 신관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다. 서연은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그 표정을 근사하게 다듬어냈다. 얼굴 관리는 이럴 때도 도움이 되는구나 싶었다. 놀라움을 우아함으로 바꾸는 그 처리 속도가 새삼 대단했다. 삼 년을 봐 온 나조차도 저 표정 전환은 매번 감탄스러웠다.
"용사님!"
도현 쪽에서도 비슷한 소란이 일었다. 검은 문양이 그의 손등에 새겨져 있었고, 갑옷 입은 병사들이 예를 갖췄다. 도현은 얼떨떨해하면서도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걸 숨기지 못했다. 팔로워 삼십만 명한테 익숙한 시선이 여기서도 통했나보다. 이 세계에도 구독자가 있었으면 벌써 좋아요 수를 세고 있었을 거다.
나는 그 화려한 소란에서 세 발짝 떨어진 자리에 그냥 서 있었다. 태호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우리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도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시선이라는 것도 자원이라면, 이 홀에 있는 시선 전부가 저 둘에게 배급되고 나머지는 배급을 못 받은 셈이었다.
"이쪽은………." 신관 중 하나가 손에 든 두루마리를 훑더니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평민, 이라고 나옵니다."
평민. 그 단어가 허공에 떠 있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두루마리를 든 신관의 눈빛에 살짝 스치는 곤란함까지도 읽혔다. 성녀와 용사를 불러들이려던 소환진에 곁다리로 붙어온 존재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매뉴얼에도 없는 일이라는 표정이었다.
서연이 나를 돌아봤다. 동정도 아니고 우월감도 아닌, 뭐랄까, 원래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세계가 바뀌어도 저 표정은 그대로구나 싶어서.
"어, 은하 너는………." 서연이 입을 열다가 말끝을 흐렸다. 그 다음 말은 없었다. 굳이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 문장이 어떻게 끝날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평민이니까 어쩔 수 없지 않을까"쯤이 뒤에 붙을 예정이었을 거다.
나는 웃었다. 이럴 때 웃는 거 말고 뭘 하겠나. 삼 년 동안 훈련된 표정 근육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평민이면 뭐가 다른 건가요?" 나는 신관에게 물었다. 존댓말이 튀어나온 건 순전히 습관이었다. 낯선 사람 앞에서 반말을 쓰기엔 아직 담이 크지 않았다.
"생계는 자력으로 해결하셔야 합니다." 신관은 사무적으로 답했다. "왕궁 소속이 아니시니 숙소나 식사 배급도 지원 대상이 아니십니다."
"숙소도요? 밥도요?" 나는 한 번 더 확인했다. 혹시 통역이 잘못됐나 싶어서.
"그렇습니다." 신관은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다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매뉴얼대로 안내하는 사람 특유의 무심함이었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성녀와 용사는 왕궁에서 밥 주고 재워주고 떠받쳐 주는데 나머지는 나가서 알아서 살라는 소리였다. 세계관이 참 노골적이다 싶었다. 판타지에 등급제가 있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 실시간으로 등급을 매겨서 뒷문으로 밀어내는 방식일 줄은 몰랐다.
태호를 힐끔 봤다. 그 애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저 바닥을 보고 있었다. 놀라지도, 억울해하지도 않는 얼굴. 원래 그런 애였나, 아니면 이 상황에 이미 뭔가 짐작한 게 있는 건가 궁금했지만 물을 타이밍이 아니었다. 그 애 손끝이 살짝 굽어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미묘한 긴장이었다.
"저쪽 문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신관이 손짓한 곳은 화려한 홀의 곁문이었다. 서연과 도현이 안내받은 정문과는 정반대 방향, 그것도 딱 봐도 뒷문 냄새가 나는 좁은 통로였다. 문 색깔부터 달랐다. 정문은 금빛으로 번쩍였고 곁문은 회색 나무 문짝에 손잡이만 겨우 달려 있었다.
걸음을 옮기면서 뒤를 한 번 돌아봤다. 서연은 이미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도현은 병사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둘 다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럴 거라 예상은 했지만, 예상이 맞았을 때의 기분은 늘 별로였다. 마음 한구석에서 그래도 한 명쯤은 "잠깐, 얘도 같이"라고 말해줄 줄 알았던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곁문을 나서자 찬 바람이 확 끼쳤다. 성벽 바깥, 돌길이 이어진 거리였다. 낯선 냄새, 낯선 소음, 낯선 하늘. 하늘색부터 이상했다. 익숙한 파랑이 아니라 회색빛이 도는 옅은 남색이었고, 태양처럼 보이는 것이 두 개나 걸려 있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앞으로 뭘 먹고 살아야 하는지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었다. 지갑도 없고, 휴대폰도 없고, 신분증도 없었다. 있는 건 몸뚱이 하나와 겨울 교복뿐이었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힐끔거렸다. 옷차림 때문인지, 표정 때문인지 구분이 안 됐다. 어느 쪽이든 반가운 시선은 아니었다.
태호가 옆에 섰다.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그 애 숨소리가 조금 빨라진 것 같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살아야겠네요, 우리."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 애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그 순간엔 이상하게 위안이 됐다. 이 낯선 거리에서 아는 얼굴이 하나라도 있다는 게, 그것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착각이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