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가게 문을 닫자마자 나는 블라인드를 내렸다.
손이 떨려서 열쇠가 자꾸 미끄러졌다.
세 번째 시도에서야 겨우 걸쇠가 걸렸다.
그 짧은 순간에도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있었다.
하늘은 테이블 하나에 걸터앉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리를 까딱거리는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눈빛만은 전혀 달랐다.
그 눈빛에서 나는 두려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것을 읽어냈다.
'그녀도 나만큼 혼란스러운 거다.'
혼란스럽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발밑이 통째로 사라진 기분, 그게 더 정확했다.
나는 맞은편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한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가게 안에는 원두 향이 여전히 배어 있었는데, 그 익숙한 냄새가 오히려 지금 상황을 더 낯설게 만들었다.
익숙한 공간에 낯선 진실이 앉아 있는 셈이었다.
"기억나?"
먼저 입을 뗀 건 하늘이었다.
"한강대 3학년, 같은 전공, 같은 강의실."
목소리는 평소처럼 가벼웠지만, 손끝은 테이블 모서리를 꾹 누르고 있었다.
저 손, 떨리는 걸 감추려고 애쓰는 손이다.
"응, 기억나."
나는 짧게 답했다.
강의실 맨 뒷줄, 창가 자리, 항상 늦게 들어와 조용히 앉던 사람.
그게 내가 기억하는 하늘의 첫 모습이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건 훨씬 무거운 기억이었다.
"그리고... 다연국."
그 이름을 입에 담자 뭔가 목구멍이 조여왔다.
마치 오랫동안 잠가둔 문을 억지로 여는 느낌이었다.
하늘의 표정이 굳었다.
방금까지의 장난스러운 기색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우리가 거기서 뭘 했는지, 다 기억나?"
"응, 전부."
나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으로 그 세계의 풍경들이 밀려들었다.
붉은 하늘, 갈라진 대지, 매캐한 화약 냄새 같은 마력의 잔향.
용사로 각성한 순간, 파티원들과의 여정, 그리고 마왕성 앞에서 마주한 유서리.
지금의 하늘이었다.
그 이름과 이 얼굴이 겹쳐지는 순간,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넌 마왕이었어."
내가 말하자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넌 용사였고."
그 대칭이 우스울 정도로 명확했다.
용사와 마왕, 그리고 지금은 같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료.
이 얼마나 어이없는 배치인가.
"우리, 서로 죽이려고 했잖아."
그 말에 하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공기가 순간적으로 무거워졌다.
"그랬지. 근데 결국 못 죽였잖아."
그녀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건 사실이다.'
최후의 결전에서, 나는 검을 든 채 그녀 앞에 섰었다.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안도가 스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치 이제야 끝나는구나, 하는 표정.
그런데 검을 내리쳤던 건 그녀가 아니라, 배후에 있던 다른 존재였다.
그 기억이 떠오르자 가슴 한복판이 뜨거워졌다.
'그 배신자.'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이는 저절로 악물어졌다.
누구였는지, 얼굴조차 흐릿하지만 그 존재가 남긴 상흔만은 선명했다.
파티원이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우리 둘을 이용하려던 제3자였을까.
지금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밝혀낼 것이다.
"왜 우리가 여기, 지금, 이 모습으로 있는 걸까."
내가 화제를 돌리자 하늘이 턱을 괴었다.
"모르겠어. 그런데 확실한 건, 우리 둘 다 원래는 여기 사람이었다는 거야."
"한강대 학생."
"그래, 그 세계로 넘어갔다가... 다시 여기로 돌아온 거지."
그녀의 말이 맞을 것이다.
원래 삶은 서울, 대학교였고, 그 후 갑작스레 다연국이라는 세계로 끌려가 용사와 마왕이 되었다.
그리고 최후의 결전 후, 우리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다만 기억을 잃은 채로.
그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그저 카페 알바 김도연으로 살았을 뿐이었다.
하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같은 강의실에서 몇 년을 스쳐 지나가며도, 서로가 누구였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이 얼마나 잔인한 우연인가, 아니, 우연이 아니라면 더 잔인한 필연인가.
"근데 왜 이제 와서 기억이 돌아온 거지?"
나는 반문하듯 중얼거렸다.
하늘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나도 몰라. 그냥... 뭔가가 건드린 것 같아."
손님의 시계, 그 표면에 비친 얼굴.
낡은 가죽 스트랩, 유리 표면에 낀 미세한 균열, 그리고 그 안쪽에서 반짝였던 이상한 빛.
평범한 골동품처럼 보였지만, 그 빛만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시계에 무언가 특별한 힘이 담겨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순간의 타이밍이 너무나 정확했다.
확실한 건, 이제 우리는 서로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이 앞으로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아직은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것.
"이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목소리에 힘을 실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만약 이 이야기가 새어나간다면.
용사와 마왕이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 뒷일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하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우리가 용사랑 마왕이었다고 하면 누가 믿겠어."
그녀는 웃으려 했지만 눈빛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저 흔들림, 나랑 똑같다.'
우리는 둘 다 겁내고 있었다.
다시 그 세계로 끌려갈까 봐, 아니면 그 세계의 무언가가 여기까지 쫓아올까 봐.
그 배신자가 이 세계에도 발을 들였을 가능성은 없을까.
그 생각이 스치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둘만의 비밀이 얼마나 더 안전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일단은... 평소처럼 지내자."
내가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카페 점원, 김도연이랑 박하늘로."
그 말이 얼마나 공허한 다짐인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하늘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씩 웃었다.
"그거 좋다. 나 원래 이름보다 하늘이가 더 좋아."
그 말에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방금까지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는데, 그녀는 벌써 태연했다.
이 무거운 대화를 나눈 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런데 그게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적어도 이 순간, 나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가게 밖으로는 여전히 저녁의 소음이 흘러가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지나가는 자동차, 지나가는 평범한 하루.
그 평범함 속에서 우리 둘만이 전혀 다른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기억이 돌아온 것만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걸, 나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그 배신자의 얼굴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머릿속은 뿌옇게 흐려졌고, 대신 손끝의 검이 부러지던 감각만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누군가는 분명 이 진실을 감추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손님의 시계가, 그 감춰진 진실의 문을 다시 열어버린 것이다.
만약 그 시계의 주인이 우연히 들른 손님이 아니라면.
만약 그 사람 역시 다연국과 연결된 존재라면.
그 가능성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다시 블라인드 틈으로 바깥을 살폈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오늘만큼은 전혀 안심이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