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다현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제단 주변에는 안도와 불안이 뒤섞인 낮은 웅성거림이 번지기 시작했는데, 방금까지도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의 위압감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사람들이 이제야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듯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노인이 서둘러 서아의 밧줄을 풀어주는데, 그 손끝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어서 서아는 순간 자신의 손목을 잡아주는 그 늙은 손이 오히려 자신보다 더 놀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숨을 구해주셨습니다." 노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그 뒤로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으며 서아를 향해 예를 표하는 모습을 보자, 서아는 이 상황이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무릎을 꿇는 소리가 흙바닥에 부딪히며 연달아 이어지는데, 그 소리가 마치 파도처럼 서아를 향해 밀려오는 것 같았고, 서아는 자신이 딱히 대단한 걸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그저 멀뚱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구해준 게 아니라 그냥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친 건데.' 그런 자조적인 생각이 스쳤지만, 마을 사람들의 눈빛에 담긴 간절함을 보고서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간절함이라니. 서아는 그 단어를 속으로 되뇌며, 자신이 게임 속에서 수백 번은 봤을 법한 표정들이 실제로 사람의 얼굴에 걸려 있는 걸 보는 게 이토록 낯설고 무겁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사흘 뒤, 다현은 다시 제단에 강림했고, 이번에는 마을 전체를 향해 짧고 건조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제물의 의식은 잠정적으로 중단한다."
그 한마디에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환호와 눈물이 동시에 터져 나왔는데, 누군가는 두 손을 하늘로 뻗으며 울음을 터뜨렸고, 또 다른 누군가는 옆 사람을 끌어안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아우성 속에서 서아는 그 순간 다현의 표정 어딘가에 스치는 냉소 같은 것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찰나였다. 하지만 분명히 보였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가는 그 짧은 순간이, 서아의 눈에는 지나치게 선명하게 박혔다.
'저건 그냥 중단하는 게 아니라… 뭔가 다른 걸 보려는 거 아닐까.' 서아의 오타쿠 감각이 은근히 경보를 울렸지만, 지금 그 의심을 마을 사람들에게 말할 계제는 아니었다.
여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인간의 생사를 유예해주는 순간에, 그 뒤에 숨은 계산 같은 걸 의심하는 사람이 이 자리에 몇이나 있을까. 서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확신했다.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촌장이라 불리는 노년의 여인이 서아 앞으로 다가와 두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당신이 여신님의 뜻을 전한 자입니다. 이제부터 이 마을의 무녀로서 우리와 함께해주십시오."
촌장의 손은 뼈마디가 앙상하게 드러났지만 그 힘은 놀랄 만큼 단단했는데, 서아는 그 손에서 전해지는 절박함이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는 걸 느끼며 순간 이 전개가 게임 속 어느 사이드 퀘스트와도 겹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갈래라는 걸 깨달았다.
'무녀라니. 이건 또 무슨 클래스야.' 서아는 속으로 어이없어하면서도,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된 이 상황에서 거절이라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조금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 서아는 마을 외곽의 작은 오두막을 배정받았다. 나무로 얼기설기 지어진 그 오두막은 문틈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올 정도로 낡았지만, 안에는 깨끗하게 정돈된 이불과 물 한 사발이 놓여 있어서 이 마을 사람들이 나름대로 정성을 들였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데, 낮에 자신이 지켜냈던 그 소녀—다은이라는 이름의 아이가—문 앞에서 쭈뼛거리며 서 있는 걸 발견했다.
다은은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발끝으로 땅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혼날 게 뻔한 걸 알면서도 도망치지 못하는 어린 짐승 같아서 서아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저… 언니." 다은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 대신 그렇게 되어주셔서… 감사해요."
목소리가 끝에서 잘게 흔들렸다. 서아는 그 서툰 인사에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참으며, 다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는데, 그 손길에 다은이 마치 작은 짐승처럼 몸을 움츠렸다가 이내 배시시 웃는 모습이 마음 한구석을 데워주는 것 같았다.
"괜찮아. 그냥… 그렇게 됐어." 서아는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그렇게 얼버무렸는데, 다은은 그 말이 무슨 대단한 겸손이라도 되는 양 눈을 크게 뜨고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은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진 뒤에도 서아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아이의 뒷모습이 사라진 어둠을 바라보았다. 저 작은 아이 하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겪은 일들이 과연 이 아이의 눈에는 얼마나 크게 보일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이내 부질없다 여기며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마을에서는 서아에게 마을 안팎을 오갈 수 있는 제한적인 자유를 허락했는데, 이는 무녀라는 지위 덕분이었지만, 촌장은 몇 번이고 신신당부하듯 말했다.
"여신님의 눈길이 닿는 곳까지만 허락됩니다."
그 말에는 어떤 경고 같은 무게가 담겨 있었는데, 촌장의 눈빛이 순간 흔들리는 걸 서아는 놓치지 않았다. 마치 그 선을 넘었을 때 벌어질 일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눈빛 같았다.
서아는 그 말을 들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그 하늘이 오히려 감시의 시선처럼 느껴져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마치 스크린 너머에서 누군가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낯설고 불편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왜 굳이 제도를 중단했을까.' 서아는 오두막 문턱에 걸터앉아 어둠이 내려앉는 마을을 바라보며 되뇌었는데, 게임 설정 어디에도 이 시점에 제물 제도가 중단된다는 기록은 없었다.
머릿속으로 게임의 스토리라인을 되짚어보았다. 원작에서는 이 마을의 제물 의식이 훨씬 더 오랜 기간 지속되었고, 주인공이 개입하기 전까지는 중단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사흘 만에 그 오랜 관습이 멈췄다. 그것도 다현의 직접적인 선언으로.
'내가 뭔가를 바꾼 건가, 아니면 원래 이런 흐름이었는데 내가 몰랐던 건가.' 확신할 수 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사이, 멀리 마을 어귀 쪽에서 낮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을 타고 실려오는 그 소리는 분명 말소리였지만, 거리가 멀어 정확한 내용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 어조에 담긴 미묘한 긴장감만은 또렷하게 전해졌다.
서아가 고개를 돌리자, 마을 사람 몇 명이 모여 서서 서아가 있는 오두막 쪽을 흘끔거리며 무언가 수군거리고 있었는데, 그 시선에는 감사와는 조금 다른, 미묘한 경계와 의심의 기색이 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 남자가 손짓을 하며 뭔가를 설명하는 듯했고, 그 옆의 여인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들 중 하나가 서아 쪽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에 서아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저건… 뭐지.' 서아는 그 눈빛들이 낮에 자신에게 무릎을 꿇었던 사람들의 것과 같은 얼굴인지 의심하며, 오두막 문을 조용히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서아는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는데, 방금 본 그 시선들이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라, 어쩌면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이 마을의 어떤 비밀과 맞닿아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스멀스멀 목덜미를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마을은 여전히 낮은 웅성거림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