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제물이 여신을 길들이다

2화

어둠이 형체를 이루는 과정은 마치 잉크가 물속에 퍼지는 걸 거꾸로 돌린 영상처럼 느껴졌는데, 서아는 그 광경을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지켜보다가 마침내 완전한 형태로 굳어진 존재 앞에서 숨을 멈췄다. 키가 큰 여자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발끝까지 흘러내리고 있었고, 피부는 마치 도자기처럼 창백했으며, 눈동자는 색이 없다고 해야 할지 모든 색을 다 삼켰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깊이를 지니고 있었다. 제단 주변의 횃불이 그녀의 몸 절반을 태울 듯 핥고 지나갔지만, 그 불빛조차 그녀의 피부에는 그늘 하나 남기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게 다현이구나.' 서아는 게임 일러스트로 수백 번은 봤던 그 얼굴을, 실제로는 그림보다 훨씬 압도적이고 훨씬 무서운 밀도로 마주하고서야, 자신이 얼마나 겁도 없이 이 캐릭터를 최애로 삼았는지를 뒤늦게 후회했다. 화면 속에서는 그저 서늘하고 아름다운 그림일 뿐이었는데, 실물은 존재 자체가 압력이었다. 두건 쓴 사람들은 일제히 바닥에 이마를 대고 엎드렸고, 그 정적 속에서 다현의 시선이 제단 위 서아를 향해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 시선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피부가 조금씩 조여드는 듯한 감각이 들었는데, 서아는 그것이 착각인지 실제로 공기가 무거워진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이건 뭐지."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서아의 귓가를 스쳤을 때, 서아는 그것이 질문이 아니라 이미 결론을 내린 사람의 확인 절차에 가깝다는 걸 직감했다. 목소리에는 억양이 거의 없었는데, 그게 오히려 더 무섭게 들렸다. 화가 났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 같았다. 노인이 바닥에 엎드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설명하려 했지만, 다현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손을 살짝 들어 제지했는데, 그 동작 하나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마을 사람들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노인은 말을 삼키다 못해 숨까지 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외지인이군. 이런 걸 제물로 바치겠다는 건가." 다현의 목소리에는 분노보다도 더 무서운 무언가가 깔려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이 상황 자체가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 것에 대한 순수한 짜증처럼 들렸다. '이런 걸'이라는 말이 서아의 가슴 어딘가를 툭 건드리고 지나갔다. 사람이 아니라 물건을 지칭하는 말투였다. 서아는 밧줄에 묶인 손목을 움직여 보며,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게임 캐릭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실감했다. 손목을 파고드는 밧줄의 거친 섬유가 살갗을 긁었고, 그 통증만큼은 지독하게 현실적이었다. 이건 컷씬이 아니었다. 스킵 버튼도 없었다. '외지인은 제물로 의미가 없다더니, 그럼 나 그냥 버려지는 거야?' 프롤로그 텍스트 어딘가에서 스치듯 봤던 문구가 떠올랐지만, 그 뒤에 이어질 내용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필 그런 대목을 스킵하며 읽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최애 캐릭터의 대사는 한 줄도 놓치지 않았는데, 자기 목숨이 걸린 설정 텍스트는 대충 읽어버렸다니. 다현의 시선이 서아에게서 마을 전체로 옮겨가는 순간, 공기가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두건 쓴 사람 중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를 냈고, 그 소리가 정적을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쓸모없는 제물을 바치고 내 시간을 빼앗았다."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낮은 비명이 터져 나왔고, 서아는 그것이 단순한 꾸짖음이 아니라 실질적인 위협이라는 걸 다현의 손끝에서 스며 나오는 검은 기운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기운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흘러내려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손끝에서 뻗어 나온 어둠이 제단 주변의 돌바닥을 스치자, 그 자리의 돌이 미세하게 갈라지는 소리를 냈는데, 그것은 마치 세트장의 배경이 실은 종이가 아니라 진짜였다는 걸 알려주는 신호처럼 서아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쩍, 하는 짧은 소리가 제단 전체에 울렸고, 그 진동이 서아의 발바닥까지 타고 올라왔다. '진짜다. 진짜 죽일 수 있어, 저 사람.' 서아는 자신이 지금까지 이 존재를 얼마나 안전한 거리에서 소비해왔는지를 실감하며, 목구멍이 바짝 마르는 걸 느꼈다. 팬아트 저장하고, 대사 캡처해서 배경화면으로 쓰고, 굿즈까지 결제했던 손이 지금은 밧줄에 묶여 떨리고 있다는 게 우스울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다현이 마을 전체를 훑어보는 그 무심한 시선 속에서, 서아는 이것이 단순한 첫 만남이 아니라 마을의 존폐가 걸린 순간이라는 걸 직감했다. 두건 쓴 이들 중 몇몇은 이미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고, 노인은 여전히 바닥에 이마를 댄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다현의 눈동자가 다시 서아에게로 돌아왔다. 그 시선이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머물렀는데, 서아는 그 짧은 순간이 몇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값어치를 매기는 건지, 처분 방법을 고민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너." 다현이 서아를 향해 한마디를 던졌다. 그 한 글자에 실린 무게가 서아의 숨을 완전히 멈추게 만들었는데, 뒤이어 다현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어둠이 서아를 묶은 밧줄 쪽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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