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빚이라는 건 참 신기하다. 갚을 방법을 찾기 전에는 절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매일 조금씩 불어난다. 이자라는 게 그렇게 무서운 건지 나는 열여덟이 되어서야 알았다. 숫자 하나가 매달 스스로 몸을 불리는 걸 지켜보는 기분이란 게 어떤 건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아버지가 서명한 종이 한 장 때문에 우리 집안은 삼 년 만에 몰락했다. 착한 게 죄는 아니라고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착함으로 사기꾼 상인에게 영지 수확량의 절반을 팔아넘겼다. 대체 왜 그런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거예요, 라고 물어봐도 아버지는 그저 웃기만 했다.
"나 원래도 사람 잘 믿는단 말이야."
그 말을 할 때 아버지의 얼굴에는 부끄러움 같은 게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뿌듯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게 더 화가 났다. 화를 낼 힘도 없어서 나는 그냥 한숨만 쉬었다.
그래서 열여덟에 시녀 일을 시작했다. 대현 공작가의 하급 시녀. 정원 관리 보조라는 직함이었지만 실제로는 잡초를 뽑는 게 주 업무였다. 나쁘지 않았다. 나는 원래 흙이랑 잘 맞는 사람이었으니까. 손톱 밑에 흙이 끼는 것도, 무릎이 흙투성이가 되는 것도 딱히 싫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잡초만 뽑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빚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문제는 서인경이었다.
대현 공작가의 집사장. 그녀는 나를 볼 때마다 눈살을 찌푸렸다. 정확히는,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내가 입고 있는 시녀복을, 내 손톱 밑의 흙을, 내가 딴 잡초 더미를 보는 것 같았다. 마치 나라는 사람 자체가 저택의 격을 떨어뜨리는 오물처럼.
"한서율. 다음 주 사교 모임에 왜 신청을 안 했지?"
"저는 그냥 정원 일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요."
"됐어. 어차피 데뷔도 안 한 애를 누가 반겨주겠어."
그 말을 하며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웃는 얼굴로 사람을 밟는 재주가 있는 여자였다. 나는 그때마다 속으로 생각했다. 저 여자는 분명 전생에 남을 밟는 직업을 가졌을 거야. 그것도 아주 능숙하게.
그리고 두 달 뒤, 나는 해고당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천것 냄새가 나는 애를 어디 사교계 심부름을 보내겠어."
서인경은 그렇게 말하며 내 앞에서 서류를 찢었다. 종이 찢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쩌겠어. 힘없는 쪽이 참는 거지. 뭐 대단한 걸 잃은 것도 아니고, 잡초 뽑는 일자리 하나였는데.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그런데도 걸어 나오는 발걸음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 앞에 그 소식을 전하려던 참이었다.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대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다행히도, 혹은 불행히도 그럴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대문 앞에 낯선 마차가 서 있었다. 문장이 새겨진, 아주 비싼 마차였다. 우리 집 앞에 저런 게 서 있을 이유가 없었다. 잘못 찾아왔나 싶어서 나는 마차와 대문을 번갈아 쳐다봤다.
"한서율 양이십니까?"
정장을 갖춰 입은 중년 남자가 물었다. 목소리에 격식이 잔뜩 배어 있어서, 나는 순간 내 이름을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청림 공작가에서 왔습니다."
청림 공작가. 이 나라에서 가장 유서 깊은 가문 중 하나. 당주가 절세의 미모를 지녔다는 소문 정도는 나도 들어본 적 있었다. 시녀들 사이에서도 몇 번이나 화제가 됐던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 집안에서 왜 우리 집을 찾아온단 말인가. 빚쟁이 가문에 볼일이 있을 리가 없는데.
"당주님께서 혼인을 계획하고 있으십니다. 신붓감의 조건은, 신분이 낮고, 조용하고, 사교계에 관심 없는 여성입니다."
나는 그 말을 세 번 되짚어 들었다. 조건이 이상하다 못해 웃겼다. 신분이 낮을 것, 조용할 것, 사교계에 관심 없을 것. 이건 신붓감을 구하는 게 아니라 방패를 구하는 소리였다. 아니면 벽지를 구하는 거거나. 존재감이 없을수록 좋다는 소리 아닌가.
"이유를 여쭤도 될까요."
남자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구혼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당주님께서는 더 이상 그걸 감당하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구나. 방패가 필요한 거구나.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절세의 미모를 지닌 공작이 구혼자들에게 시달려서 눈에 안 띄는 여자를 찾는다니. 남의 인생 참 팔자 좋다 싶으면서도, 동시에 이해가 갔다. 나였어도 그런 시선을 매일 받는 건 지긋지긋할 것 같았다.
"조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혼인 성립 시, 영애의 가문이 진 빚은 청림 공작가가 전액 청산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사랑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애초에 기대한 적도 없다. 나는 그냥 아버지가 감옥에 가지 않고, 조용히 여생을 보낼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사랑이 밥을 먹여주지도 않고, 사랑이 아버지를 감옥에서 구해주지도 않으니까.
"하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짧고 명확했다. 남자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마치 내가 그렇게 대답할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어쩌면 이런 제안을 들고 여러 집을 돌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다들 나처럼 대답했겠지. 빚에 쫓기는 사람에게 이보다 확실한 탈출구가 어디 있을까.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계약서였다. 결혼이라기보다는 거래에 가까운 문서. 조항들이 빼곡했다. 나는 그걸 다 읽어볼 여유도 없이, 아니 사실은 읽어봤자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아서, 그 위에 이름을 적었다. 한서율. 내 손으로 내 운명을 서명하는 기분이었다. 손끝이 살짝 떨렸던 것 같기도 하다.
아버지에게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할 새도 없었다. 남자는 사흘의 시간을 주었을 뿐, 그 이상의 여유는 없다고 했다. 나는 결국 아버지에게 절반만 진실을 말했다. 좋은 혼처가 생겼다고, 빚도 다 갚아준다고 했다고. 아버지는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잡았다. 딸을 팔아넘긴다는 자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여전히 얄미웠지만, 그래도 웃어줬다. 어쩌겠어. 저 사람 없인 나도 여기까지 못 왔을 거고.
사흘 뒤, 나는 청림 공작가로 가는 마차에 올라야 했다. 짐이라고 할 것도 거의 없었다. 옷 몇 가지, 어머니가 남긴 낡은 손수건 하나. 그게 다였다. 그 안에서 나는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어차피 얼굴도 모르는 남자다. 그저 서류 위의 이름일 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걸까. 나 원래도 낯선 사람 앞에서 긴장하는 편은 아닌데, 이건 좀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앞으로 내 인생 전체가 걸린 문 앞에 서 있는 기분.
마차는 오래 달렸다. 길이 점점 넓어지고, 지나가는 풍경도 점점 화려해졌다. 나는 창문에 이마를 붙이고 그 변화를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이런 걸 보고 살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도 되지 않았다.
마차가 청림 공작가의 정문을 지나던 순간, 나는 처음으로 그 저택의 크기에 압도당했다. 대현 공작가도 크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건 그 몇 배는 되는 것 같았다. 정원만 해도 우리 옛 영지보다 넓어 보였다.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한다니. 나 원래도 이런 큰 집은 무섭단 말이야…….
마차가 멈췄다. 문이 열렸다. 심장이 목까지 올라온 기분으로 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대문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머리, 차가운 눈매. 표정이라는 게 아예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눈빛이 나를 훑는 순간, 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사람을 저렇게 무표정하게 볼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가 바로 이규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