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악역이라 불린 첫사랑

2화

다음 날부터 학원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냥 "한소율"이었던 이름이 오늘부터는 "성녀 후보 한소율 양"으로 격상되어 있었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사람들이 소율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몇몇은 대놓고 다가와 말을 걸었다. 마치 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유명인이 된 것처럼. "한소율 양, 저희 다과회에 초대해도 될까요?" "저희 기숙사 쪽에 자리를 마련해두었는데요." "성녀님,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성녀님이라니. 나는 그 호칭이 나올 때마다 소율의 어깨가 움찔거리는 걸 옆에서 봤다. 소율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거절도 못 하고 그냥 서 있기만 했다. 저 웃음, 나는 안다. 곤란할 때 짓는 웃음이라는 걸. 초등학교 때 급식 반찬 남기면 안 된다고 억지로 다 먹고 체했을 때도 저 웃음을 짓고 있었지. 나는 결국 소율의 팔을 잡고 무리에서 빼내는 역할을 맡았다. 벌써 삼 일째 하는 일이었다. "죄송한데 수업 들어가야 해서요." "저기, 이서윤 양은…" "네, 저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렇게 웃으면서 소율을 끌고 나왔다. 하급 귀족인 내가 저런 화려한 무리 앞에 서면 딱 그 정도 취급을 받았다. 지나가는 사람. 나쁘지 않은 위치였다. 눈에 안 띄면서 소율 곁에 붙어 있을 수 있으니까.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만약 내가 눈에 띄는 위치였다면, 저 무리는 나부터 캐물었을 거다. 성녀 후보의 친구는 뭐 하는 애냐, 집안은 어떻고, 뭘 노리고 붙어 다니냐. 그런 질문들. 문제는 소율을 향한 관심이 하루하루 눈덩이처럼 커진다는 거였다. 처음엔 다과회 초대 정도였는데, 이제는 소율의 시간표를 외워서 강의실 앞에서 기다리는 애들까지 생겼다. 심지어 어제는 어떤 남학생이 꽃을 들고 왔다가 소율이 아니라 나한테 화병이 어디 있냐고 물어봤다.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저 파벌들이 소율이한테 붙는 거, 그냥 관심이 아니야." 같은 반 친구가 지나가듯 던진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성녀 후보라는 게 단순한 종교적 상징이 아니라 정치적 자산이라는 걸, 나도 이 학원에서 삼 년을 다니며 대충은 눈치채고 있었다. 성녀를 자기 파벌에 끌어들이면 신전의 입김까지 얻을 수 있다는 얘기를 어디서 주워들은 게 아니라, 지금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게임으로 치면 갑자기 희귀 아이템이 튀어나온 격이다. 다들 그 아이템을 갖겠다고 몰려드는 거고, 소율은 그 아이템 취급을 받고 있는 거고. 그날 오후, 나는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다가 다시 권시아와 마주쳤다. 서가 사이에 혼자 서 있던 권시아는 내가 다가가는 걸 보고 흠칫 뒤로 물러섰다. 마치 내가 무슨 짐승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에 들고 있던 책을 가슴에 꼭 끌어안는 모습이, 위협을 느낀 사람의 자세와 똑같았다. "저, 죄송합니다. 방해가 됐다면…" "아, 아니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소문에서 듣던 얼음장 같은 톤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너무 작고 조심스러워서, 옆에서 조금만 세게 숨을 쉬어도 놀랄 것 같았다. 시녀를 몇이나 자르고 하급생을 자퇴시켰다는 그 악명 높은 악역 영애가, 지금 내 앞에서는 길 잃은 고양이처럼 서 있었다. "권시아 양이시죠?" "…네." 짧은 대답 뒤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뭔가 더 말을 걸고 싶었는데,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날씨 얘기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책 제목이라도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그녀는 먼저 책 한 권을 품에 안고 자리를 벗어났다. 도망치듯 빠른 걸음이었다. 구두 소리가 서가 사이로 멀어지는 걸 들으며,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악역 영애라는 소문의 주인공이 저렇게 사람을 피해 다닌다는 게 이상했다. 시녀를 몇이나 자른 사람이라면, 하급생을 괴롭혀 자퇴시켰다는 사람이라면, 저런 걸음걸이를 하지 않을 것 같은데. 오히려 당당하게 어깨 펴고 다니면서 자기가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과시해야 정상 아닌가. 근데 저건 뭐지. 저건 그냥, 겁먹은 사람이잖아. 그 뒤로 며칠, 나는 우연을 가장해 몇 번 더 권시아를 마주쳤다. 정원에서, 복도 구석에서, 늘 혼자였고 늘 왕태자 재헌이 근처 어딘가에 있었다. 마치 감시하는 건지 지키는 건지 구분이 안 되는 거리감으로. 처음에는 재헌이 그녀를 감시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원작대로라면 그가 그녀를 미워해야 하니까. 그런데 볼수록 그 거리감이 좀 이상했다. 감시하는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한번은 정말로 이상한 걸 봤다. 권시아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뎠을 때, 재헌이 순식간에 나타나 그녀의 팔을 받쳤다.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는데, 그 속도가 훈련된 검사 같았다. 나는 그 광경을 계단 아래에서 멀뚱히 지켜보다가, 저게 무슨 반사신경인가 싶어서 속으로 감탄했다. 무협 영화에서나 볼 법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붙잡은 채로 짧게 속삭이는 말을 나는 우연히 들었다. "다치면 안 됩니다." "…혼자서도 괜찮은데요." "제가 안 괜찮습니다." 짧은 대사가 끝나자마자 재헌은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를 떴다.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마치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스스로도 놀라서 도망치는 것 같았다. 권시아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표정이 복잡했다. 원망도 아니고 애정도 아니고, 그 중간의 무언가. 뭐라고 해야 하나. 혼란스러워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악역 영애, 냉정한 왕태자. 학원 전체가 그렇게 부르는 그림과, 내가 목격한 그림은 자꾸 어긋났다. 어긋난 채로 계속 쌓이고 있었다. 소문 속의 두 사람과, 내 눈앞의 두 사람이 자꾸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건 뭐지. 원작이 이상한 건가, 아니면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건가. 그날 밤 소율을 재우고 방으로 돌아오는 길, 복도 끝에서 낯익은 뒷모습을 봤다. 오빠였다. 늦은 시간에 왜 학원 복도를 서성이고 있는지 이상했지만, 오빠는 원래 예고 없이 나타나는 사람이었다. "도현 오빠?" 오빠는 뒤를 돌아보더니 살짝 웃었다. 그 웃음이, 평소보다 어딘가 무거워 보였다. "서윤아, 마침 잘 만났다. 너한테 할 얘기가 있는데." 그 순간 나는 왠지 좋은 얘기는 아닐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복도의 불빛이 유난히 어둡게 느껴졌고, 오빠의 표정에서 평소의 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오빠가 다음 말을 뱉기를 기다렸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