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붉은 눈이 녹는 계절

3화

저택에서의 첫 며칠은 서은에게 낯선 침묵의 연속이었다. 하루에 세 번 하녀가 식사를 가져다주었는데, 그마저도 필요한 말 외에는 입을 열지 않았고, 복도를 지날 때마다 하녀들의 시선이 서은의 등 뒤에 조심스럽게 따라붙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선우진과는 복도에서 마주쳐도 서로 시선을 피하는 일이 더 잦았는데, 그럴 때마다 서은은 안도와 서운함이 뒤섞인 이상한 감정을 느끼며 스스로도 그 정체를 알 수 없어 고개를 저었다. 대체 뭘 기대하고 있는 건지,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다. 방 안에 갇혀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은의 머릿속에는 온갖 소문들이 되풀이해서 떠올랐다. 형을 죽이고 작위를 찬탈했다는 이야기, 지하에서 사람을 상대로 실험을 한다는 이야기, 밤마다 저택 어딘가에서 신음 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까지. 처음에는 무섬증에 이불을 뒤집어썼지만, 사흘째가 되자 오히려 궁금증이 무서움을 이기고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팔려 온 몸, 죽이려면 벌써 죽였을 거라는 계산이 서자 서은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저택의 안쪽으로 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은은 저택을 둘러보다가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발견했다. 지하 서재는 절대 열지 말라는 규칙이 있었지만, 그 계단은 서재로 향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이었기에 서은은 조심스럽게 발을 내밀었다. 계단은 차갑고 좁았으며, 한 걸음씩 내려갈 때마다 등불의 그림자가 벽을 따라 길게 늘어졌다가 다시 움츠러들었다. 계단 끝에는 작은 방이 있었고,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안을 들여다본 순간 서은은 숨이 턱 막혔다. 벽면을 가득 채운 유리병들, 그 속에 담긴 알 수 없는 액체와 표본들, 그리고 정교하게 그려진 인체 해부도가 벽 한가득 붙어 있었다. 그것은 확실히 인체실험이라는 소문을 뒷받침하는 광경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서은은 문틀을 붙잡고서야 겨우 몸을 지탱했다. "뭐 하는 거지." 등 뒤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서은은 심장이 튀어나올 듯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선우진이 팔짱을 낀 채 문가에 서 있었는데, 그 붉은 눈에는 화가 난 기색보다는 오히려 지친 듯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그, 죄송합니다. 그냥…… 둘러보다가." 서은은 뒷걸음질 치며 두 손을 모아 쥐었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고, 이대로 쫓겨나거나 더 심한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릎이 떨렸다. 선우진은 말없이 방 안으로 들어와 유리병 하나를 집어 들었는데, 그 안에는 시든 식물의 뿌리가 담겨 있었다. 그는 그것을 등불 아래로 가져가 잠시 들여다보더니, 다시 원래 자리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건 약초 연구소야." 그가 짧게 설명했다. "소문처럼 사람을 실험하는 곳이 아니라." "……약초요?" 서은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방 안을 다시 훑어보았다. 해부도라고 생각했던 그림들이 다시 보니 식물의 뿌리와 잎맥을 세밀하게 그린 것이었다. 세필로 그려낸 듯 정교한 그림들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잎사귀 하나하나에 이름과 효능이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그것을 인체 해부도로 착각했다는 것이 새삼 부끄러워 서은의 귀가 붉어졌다. "기침에 쓰는 것도 있고, 열을 내리는 것도 있고." 선우진이 유리병들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덧붙였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만들었군." "아, 아니요. 제가 함부로 들어온 거니까……." 서은은 말끝을 흐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내 형은." 선우진이 유리병을 다시 내려놓으며 낮게 말했다. "불치병으로 죽었다. 나는 그 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으려 했었고." 서은은 그 말에 숨을 죽였다. 형을 죽이고 작위를 찬탈했다는 소문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그 목소리에는 후회인지 슬픔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낮은 떨림이 섞여 있어서, 서은은 함부로 다음 말을 물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선우진은 그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려 방을 나섰고, 서은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 저택의 소문들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처음으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 * * 그날 저녁, 식사 시간에 선우진이 처음으로 서은과 같은 식탁에 앉았다. 넓은 식탁에 두 사람만 마주 앉아 있으니 그릇 부딪는 소리조차 유난히 크게 울렸고, 서은은 괜히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하녀가 서은의 접시에 수프를 채우는 동안 문득 물었다. "기침은 좀 어때." 서은은 그 질문에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괘, 괜찮습니다." "거짓말하는 거 다 보인다." 선우진이 무심하게 지적했다. "방금도 세 번이나 참았잖아." 서은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정말로 기침을 참느라 애를 쓰고 있었는데, 그것을 들켰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부끄러웠다. "그, 그게 원래…… 밤바람을 좀 많이 쐬어서." "밤에 창을 열어놓나." 선우진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그, 잠이 잘 안 와서 그런 거고요……." 서은이 얼른 덧붙였다. "약을 지어주겠다." 선우진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 약초 방에서 쓸모 있는 것 몇 가지는 있을 테니." "……왜, 왜 그렇게까지 해주시는지." 서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저택에 팔려 온 물건 취급을 받는 것이 당연할 텐데, 굳이 약까지 지어주겠다는 그의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선우진은 수프를 뜨던 숟가락을 멈추고 잠시 서은을 바라보았는데, 그 붉은 눈동자에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물건이 상하면 곤란하니까." 그가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서은은 그 말에 서운함을 느꼈지만, 동시에 그 서운함이 얼마나 이상한 감정인지도 자각했다. 그녀는 물건이라는 취급을 받는 것에 화가 나야 할 텐데, 오히려 신경 써주는 그의 말투에서 어떤 온기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 명명할 수 없는 그 감정이 가슴 한편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고, 서은은 그것을 애써 모른 척하며 수프를 떠먹었다. 수프는 따뜻했고, 생각보다 짜지 않았다. 식사가 끝난 뒤 선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짧게 말했다. "내일부터 아침마다 정원을 걸어라. 몸에 좋을 거다." "……네?" "명령이다." 그가 짧게 덧붙이고는 방을 나섰다. 서은은 텅 빈 식탁 앞에 잠시 앉아 있다가, 하녀가 접시를 치우러 오는 것을 보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령이라고 못을 박아버리니 딱히 거절할 구실도 없었고, 애초에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그저 낯설었을 뿐이었다. 이 저택의 규칙들이 처음 들었을 때와는 다르게 조금씩 다른 색깔로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서은은 그제야 깨달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선 곳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의 건강을 걱정해준다는 낯선 경험을 하고 있었다. 그날 밤, 서은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창밖에서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고, 그 소리에 섞여 낮에 본 지하 방의 유리병들과, 선우진의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번갈아 떠올랐다. 붉은 눈의 남자가 무섭다는 감정과,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된다는 감정이 동시에 그녀의 마음속에서 부딪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저택이었다. 팔려 온 몸이라 여기며 마음을 다잡았는데, 자꾸만 그 각오가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 같아서, 서은은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기며 애써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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