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붉은 눈이 녹는 계절

2화

저택 안은 바깥의 안개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대리석 바닥은 발소리를 이상하게 울려 퍼지게 했고, 벽에 걸린 초상화들은 하나같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서은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선우진의 등을 따라 걸으며, 이 저택 어딘가에 죽은 두 명의 전처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내려 애썼다. 복도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고, 그 끝마다 촛대가 하나씩 놓여 흔들리는 불빛을 던졌는데, 그 불빛조차 어딘가 인색하게 느껴졌다. 서은은 발끝이 시린 것을 느끼며 자신이 신고 있는 낡은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청안 백작가에서 신던 것 그대로였다. 이 화려한 저택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신발이 유일하게 그녀가 서은이라는 사람이었다는 증거처럼 느껴져서, 서은은 괜히 그 신발 끝을 바닥에 대고 문질렀다. 선우진은 응접실이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넓은 방으로 서은을 데려갔고, 벽난로 앞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서은은 조심스럽게 의자 끝에 앉았는데, 등이 곧게 펴진 채로 앉아 있는 그 자세가 오히려 더 불안해 보였다. 벽난로 속 장작이 타 들어가며 탁, 소리를 냈고, 그 소리에 서은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이름이 뭐지." 선우진이 물었다. "한, 한서은입니다."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청안 백작가의……." "신분은 필요 없어." 그가 서은의 말을 잘랐다. "이름만 알면 된다." 서은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태도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사무적이었고, 그것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온갖 소문 속의 악마 같은 존재라면 당장이라도 그녀를 실험대에 눕힐 것 같았는데, 지금 그는 마치 새로 들인 가구의 치수를 재는 사람처럼 무심했다. 그의 얼굴은 세필로 그린 초상화처럼 정교했지만, 그 정교함 속에 온기라는 것이 완전히 빠져 있어서, 서은은 그를 사람이 아니라 아주 잘 만들어진 조각상처럼 느꼈다.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지금 물어." 선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밤이 늦었으니 오래 걸리진 않았으면 좋겠군." 서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죽음을 각오한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용기를 끌어모아 물었다. "저는…… 왜 여기 팔려 온 겁니까." 선우진은 팔짱을 낀 채 벽난로의 불빛을 응시했다. 붉은 눈동자가 불빛을 받아 더욱 짙게 물들어 갔는데, 그 표정에서는 어떤 대답의 조짐도 읽어낼 수 없었다. 서은은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자신의 심장이 조금씩 오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하고 끌려 나가는 건 아닐까, 아니면 저 붉은 눈이 갑자기 짐승의 것처럼 변해서……. 서은은 그런 시답잖은 상상을 하다가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졌다. "몸이 약하다고 들었다." 그가 마침내 말했다. "기침이 잦고, 피부에 문제가 있다지." "……네." "그거면 됐어. 이유는 알 필요 없다." 서은의 심장이 다시 철렁 내려앉았다. 역시, 실험체. 유나가 했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서은은 두 손을 무릎 위에서 꽉 움켜쥐며 다음에 벌어질 일을 상상하지 않으려 애썼다. 유나는 저택에 팔려 간 여자들이 결국 무슨 이상한 약물을 먹이는 실험 재료가 되었다는 소문을 몇 번이나 속닥거렸었고, 그때는 그저 흘려들었던 그 말이 이제 와서 뼈저리게 되살아났다. 그런데 선우진의 다음 말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 저택에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그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열거하기 시작했다. "첫째, 서쪽 탑에는 절대 올라가지 마라. 둘째, 밤 열 시 이후에는 복도를 다니지 마라. 셋째, 지하 서재의 문은 항상 잠겨 있을 것이니 열려고 시도하지 마라." 서은은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규칙…… 이라고요?" "규칙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한가." 선우진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는데, 그것이 웃음인지 조소인지 알 수 없었다. "굳이 알고 싶지 않을 거다." 서은은 마른침을 삼켰다. 죽음을 각오하고 이 저택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처형 명령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생활 규칙이었다. 그것이 더 무섭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남자가 정말로 그녀를 오랫동안 이 저택에 머물게 할 생각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서은은 속으로 규칙을 하나씩 되짚어 보았다. 서쪽 탑, 밤 열 시, 지하 서재. 셋 다 지키기 어려운 것들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단순함이 더 께름칙했다. 대체 저 안에 뭐가 있길래. "그리고." 선우진이 덧붙였다. "당장 실험이니 뭐니 하는 일은 없을 거다. 소문을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은은 그의 말이 순간적으로 이해되지 않아 눈을 깜박였다. "그, 그럼 저는……왜 이곳에." "대금은 이미 지불했다." 선우진은 마치 그것이 모든 설명을 대신한다는 듯 짧게 말했다. "네 아버지가 원한 건 돈이었고, 내가 원한 건……." 그는 말을 하다가 멈췄는데, 그 침묵이 방 안의 공기를 더 무겁게 만들었다. 서은은 그가 이어지지 않은 말의 끝을 궁금해했지만, 감히 다시 물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벽난로의 불빛이 그의 옆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고, 그 그림자 속에서 그는 잠깐이지만 사람보다는 어떤 오래된 그림 속 인물처럼 보였다. 서은은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스스로 놀라서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저 얼굴을 뜯어보고 있다니, 정신이 어떻게 된 게 분명했다.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면 된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화를 끝냈다. "방은 하녀가 안내할 거고, 필요한 게 있으면 종을 울려. 다만……." "다만, 무엇을요." 서은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내 방 근처엔 오지 마라." 선우진의 붉은 눈이 서은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게 유일하게 중요한 규칙이다."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방을 나섰고, 서은은 벽난로의 불빛 앞에 혼자 남아 방금 들은 규칙들을 곱씹었다. 죽지 않을 거라는 것, 실험체가 되지 않을 거라는 것. 그것만으로도 서은은 처음으로 이 저택에서 안도라는 감정을 느꼈는데, 그 안도감이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벽난로의 장작이 타 들어가는 소리만이 유일한 대화 상대가 되어 주었다. 서은은 무릎 위에 얹어 둔 손을 펴 보았다. 손끝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죽을 각오로 들어온 곳에서 죽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듣는다는 게 이렇게 허탈한 일일 줄은 몰랐다. 마치 형장에 끌려갔다가 갑자기 훈방 조치를 받은 사람처럼, 서은은 어디에 감정을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 * 곧 나이 든 하녀 한 명이 들어와 서은을 방으로 안내했다. 복도를 걸으며 하녀는 등불을 든 채 앞서갔는데, 그 걸음이 익숙한 듯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서은은 그 뒷모습을 보며, 이 저택에서 오래 일한 사람일 것이라 짐작했다. 방은 작지만 깨끗했고, 침대에는 새 이불이 깔려 있었다. 서은은 그 낯선 안락함에 오히려 몸이 굳어졌다. 청안 백작가의 뒤채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방이었으므로. 뒤채의 방에는 늘 곰팡이 냄새가 났고 창문 하나가 깨져 있었는데, 여기는 창문마다 유리가 온전했고 커튼조차 두 겹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서은은 손끝으로 이불을 살짝 만져 보았다. 부드러웠다. 이렇게 부드러운 이불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공작님은…… 원래 이런 분이신가요." 서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녀는 잠시 서은을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아가씨가 직접 겪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대답이 왠지 서은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았다. 하녀는 등불을 협탁 위에 내려놓고는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서은은 홀로 남은 방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안개는 아직 걷히지 않은 채 저택의 창을 온통 뒤덮고 있었고, 그 너머로 어렴풋이 서쪽 탑의 실루엣이 비쳤다. 절대 올라가지 말라던 그 탑이었다. 서은은 이불 속으로 몸을 밀어 넣으며 오늘 하루 동안 벌어진 일들을 되짚었다. 팔려 왔다는 것, 실험체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상한 규칙들. 무엇 하나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내 방 근처엔 오지 마라. 그 말을 할 때 붉은 눈동자에 스쳐 지나갔던 표정은, 단순한 경고라기보다는 뭔가를 숨기려는 사람의 것처럼 보였다. 서은은 눈을 감았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창밖의 안개 사이로, 서쪽 탑의 창문 하나에서 희미한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누구도 올라가서는 안 된다던 그 탑에, 분명 누군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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