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겨울이 오기도 전에 한서은의 손끝은 이미 얼어 있었다. 청안 백작가의 뒤채, 하녀들도 발을 들이지 않는 그 좁은 방에서 그녀는 낡은 담요를 끌어안은 채 창밖의 눈발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저택이 조용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불안했다. 서은은 열일곱 해를 살아오면서 이 저택이 조용할 때는 항상 나쁜 일이 벌어지기 직전이라는 것을 몸으로 배워왔다.
"서은아."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것은 유모였는데,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손은 떨리고 있었다. "백작님이…… 너를 부르신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은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그녀를 직접 부르는 일은 드물었다. 아니, 지난 삼 년간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계모의 입을 통해서, 혹은 유나의 비웃음을 통해서만 아버지의 뜻이 전달되었을 뿐이었으므로.
서은은 기침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폐병을 앓는 것처럼 늘 마른기침이 따라다녔는데, 계모가 매달 불러들이는 의사는 하나같이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는 서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진단서 한 장이 나올 때마다 계모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스치는 것을, 서은은 놓치지 않았을 뿐이었다.
응접실에 들어서자 아버지 한태식이 소파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계모 서혜숙과 여동생 유나가 나란히 서 있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서은에게 쏠렸는데, 그 눈빛들 속에는 동정이나 죄책감 같은 것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서은이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물었다.
"짐을 챙겨라." 한태식은 서은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오늘 밤 청류 공작저로 떠난다."
서은은 그 말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청류 공작저라니. 선우진 공작이라면 사교계에서 절대 입에 담지 않는 이름이었다. 형을 죽이고 작위를 찬탈했다는 소문, 인체실험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소문, 그리고 결혼한 아내들이 하나같이 몇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소문까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제가……왜요." 서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냐니." 유나가 킥킥 웃으며 끼어들었다. "언니, 몰라서 물어? 아버지가 언니를 판 거잖아. 공작이 병약한 여자를 원한다나 봐. 실험체로 딱이라면서."
실험체. 그 단어가 귀에 박히는 순간 서은의 무릎이 후들거렸다. 계모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마치 오늘 저녁 메뉴를 정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거래는 이미 끝났다. 공작저 사람들이 밤에 데리러 올 거야. 순순히 따라가도록 해라. 저항해서 좋을 게 없을 테니."
서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저택에서 십칠 년을 살아왔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게 없었는데, 이제는 목숨마저 아버지의 손에서 팔려나가는 물건이 되어 있었다. 서글프다는 감정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그저 몸이 시키는 대로 고개를 숙이고 방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정말로 마차 한 대가 저택 앞에 멈춰 섰다. 검은 칠을 한 마차는 등불 하나 없이도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마차에서 내린 것은 온통 검은 옷을 입은 하인이었다. 그는 서은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모시러 왔습니다, 아가씨."
서은은 낡은 가방 하나만을 든 채 마차에 올랐다. 창밖으로 멀어지는 저택의 불빛을 바라보면서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슬프다는 감정보다는 차갑고 텅 빈 무감각이 먼저 찾아왔다.
마차가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거대한 성채였다. 안개가 짙게 깔린 숲 한가운데 우뚝 솟은 그 저택은 마치 세상과 단절된 것처럼 고요했으며, 창문마다 불빛 하나 없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서은은 마차에서 내리며 그 압도적인 어둠 앞에서 다리가 굳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저택의 커다란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안에서 걸어 나온 남자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으며, 검은 머리카락이 촛불에 비쳐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서은의 시선을 완전히 붙잡은 것은 그의 눈이었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세밀한 화가가 온갖 정성을 들여 그려낸 악마의 초상 같았다.
"네가 그 물건인가." 남자, 선우진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물건. 그 말에 서은의 온몸에서 남아 있던 마지막 온기마저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 붉은 눈을 마주 보았고, 그 순간 자신이 이제 정말로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선우진은 서은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고, 그 시선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물건의 품질을 확인하는 상인의 눈빛, 그뿐이었다.
"들어와." 그가 짧게 명령하며 몸을 돌렸을 때, 서은은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휩싸이며 천천히 그 검은 문턱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