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내 남편이, 내 조카랑?

4화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오후, 서연은 정원에 나가 화단을 정리하고 있었다. 볕이 좋아 오늘은 국화 화분들을 양지바른 쪽으로 옮겨두어야겠다고 생각한 참이었는데, 손끝에 닿는 흙은 서늘했고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마당 한켠에 쌓인 낙엽들을 쓸며, 서연은 문득 이 계절이 참 빨리도 지나간다는 생각을 했다. 작년 이맘때는 이 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것이 낯설고 조심스러웠는데, 이제는 화단의 흙 냄새마저 익숙하게 느껴질 만큼 시간이 흘렀구나 싶어서였다. 국화 화분을 옮기려던 참이었는데, 문득 사랑채 쪽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하은의 웃음소리였다. 평소보다 조금 더 낮고, 조금 더 은근한 톤이라는 걸 서연은 미처 의식하지 못한 채 그저 반가운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사이좋게 이야기라도 나누고 있으려니,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서연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태준과 하은이 사랑채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태준의 손이 하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고 있었다. 흡사 연인 사이에서나 오갈 법한 손길이었다.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는 그 동작에는 조금의 서두름도 없었고, 오히려 오래도록 익숙한 사람에게나 보일 법한 여유로움이 배어 있었다. 하은은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은 채 살짝 눈을 감고 있었고, 태준의 얼굴에는 서연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다정함이었다. 서연이 아는 태준의 얼굴에는 없던, 낯설고 부드러운 다정함. 서연의 손에서 화분이 그대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쨍그랑,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고,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깨진 화분 조각들 사이로 흙과 국화 뿌리가 흩어졌지만, 서연의 눈에는 그런 것들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고, 귓속에서 이명이 울리는 것 같았다. 방금 본 게 뭐였지, 내가 잘못 본 건가. 서연은 몇 번이고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되풀이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서, 서연아." 태준이 벌떡 일어서며 그녀를 향해 다가왔지만, 서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리가 땅에 뿌리라도 내린 듯 움직여지지 않았고, 입술은 뭔가 말을 하려다가도 그대로 다물어지고 말았다. "이, 이모, 저는 그냥……" 하은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더듬거렸지만, 서연은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하은의 얼굴은 방금 전까지 눈을 감고 있던 그 편안한 표정과는 완전히 다르게, 이제는 당혹감으로 새하얗게 굳어 있었다. "머리에, 머리에 뭐가 묻어서." 태준이 다급하게 변명하듯 말했다. "낙엽이 붙어 있길래 떼어준 것뿐이야." 그럴듯한 말이었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가을이니 낙엽쯤이야 머리카락 사이에 얼마든지 걸릴 수 있었고, 그걸 떼어주는 손길이 무슨 큰 잘못이겠는가. 하지만 서연이 목격한 그 손길은, 단순히 낙엽을 떼어주는 손길이라기엔 지나치게 부드럽고, 지나치게 다정했다. 낙엽 하나를 떼어내는 데 그렇게 오래 손가락을 머물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천천히, 그렇게 조심스럽게 쓸어 넘길 이유도 없었다. "아, 그, 그렇구나." 서연은 겨우 그 한마디를 짜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입꼬리가 제대로 올라가지도 않았다. 얼굴 근육이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태준이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잡으려 했지만, 서연은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섰다. 그 순간 태준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당황한 기색을, 서연은 놓치지 않았다. "서연아, 왜 그래?" 태준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지만, 서연은 그 목소리마저 낯설게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하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그 손이, 지금은 자신을 향해 뻗어오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마음에 걸렸다. "아, 아니에요. 그냥 화분을 깨서, 치워야 할 것 같아서요." 서연은 몸을 굽혀 깨진 화분 조각을 주섬주섬 주웠는데, 손끝이 심하게 떨려서 몇 번이나 조각을 놓치고 말았다. 흙 속에 손가락을 파묻고 있으니 차라리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듯했다. 적어도 손을 움직이고 있으면, 방금 본 장면을 곱씹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하은은 그 자리에서 얼른 도망치듯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태준은 한동안 서연의 곁에 서서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도와 화분 조각을 주웠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침묵은 무겁고 어색했다. 평소라면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을 텐데, 지금은 서로의 손이 흙 속에서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화분 조각을 다 주운 뒤에도 태준은 몇 번이나 입을 열려는 듯 숨을 들이켰지만, 그때마다 서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버려 그 말은 끝내 나오지 못했다. "저녁 준비해야 해서요." 서연은 그렇게 짧게 말하고는 부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태준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서연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날 밤, 서연은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편지를 다시 꺼내 들었다. 몇 달 전, 누군가 대문 앞에 던져두고 간 그 편지를 처음 읽었을 때는 터무니없는 모함이라 여기고 구겨 던져버리려 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 종이를 다시 펼쳐드는 손이 이상하게도 무겁게 느껴졌다. 종이는 여전히 구겨진 채였지만, 그 안의 문장은 이제 더 이상 터무니없는 모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몇 줄 되지 않는 짧은 문장들이었는데, 낮에 본 그 장면과 겹쳐지자 마치 새로운 의미를 갖고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서연은 편지를 손에 쥔 채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창밖의 달빛이 그녀의 어깨 위로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방 안은 고요했고, 이따금 마당에서 바람에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서연은 몇 번이고 편지를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그 문장들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이 편지를 처음 받았을 때의 자신과, 지금 이 편지를 손에 쥔 자신은 분명 같은 사람인데도 어쩐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낙엽 하나 떼어주는 데, 그렇게 다정한 손길이 필요했던가. 서연은 그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한 채, 그 밤 내내 뜬눈으로 지새워야 했다. 창밖이 서서히 밝아올 때까지도, 서연의 손에서는 그 구겨진 편지가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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