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음 날 아침, 서연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새벽같이 눈을 떴다. 창밖은 아직 푸르스름한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각이었고, 이불 속에서 잠시 눈을 감은 채 뒤척였던 지난밤의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났지만, 서연은 애써 그것을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종부로서의 하루는 언제나 이렇게 시작되었는데, 어른들의 조반을 챙기고 집안 대소사를 살피는 일이 그녀에게는 숨 쉬듯 익숙한 일상이었다.
세면을 마치고 부엌으로 향하는 복도는 고요했다. 마룻바닥이 발밑에서 삐걱거리는 소리조차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고, 서연은 그 소리에 흠칫하다가도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집에서 십오 년을 살았는데 아직도 마룻바닥 소리에 놀라다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었다.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서연은 무쇠솥을 꺼내 물을 붓고 불을 올렸다. 된장을 풀고 두부를 썰어 넣으며 국을 끓이는 손길은 익숙했지만, 마음은 자꾸만 어젯밤 서랍 속에 넣어둔 그 편지로 향했다. 밤새 뒤척인 탓에 눈 밑이 거뭇했지만, 서연은 애써 밝은 얼굴로 국자를 젓고 또 저으며 편지의 내용을 머릿속에서 지워내려 애썼다. 별것 아닐 거야. 별것 아닐 거야.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지만, 그 말은 되뇔수록 오히려 더 불안하게 들렸다.
"여기 있었네, 우리 부인." 등 뒤에서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태준이 부엌으로 들어서며 뒤에서 그녀를 살짝 끌어안았고, 서연은 화들짝 놀라 국자를 놓칠 뻔했지만, 그의 익숙한 체온과 은은한 비누 향기가 코끝을 스치자 저도 모르게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의 팔이 허리를 감싸는 순간, 어젯밤 내내 그녀를 괴롭히던 불안이 잠시나마 옅어지는 듯했다.
"아침부터 별걸 다." 서연이 핀잔을 주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고, 태준은 그런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웃었다. 세필로 그린 듯 단정한 그의 옆얼굴이 아침 햇살 속에서 유독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오늘따라 유난히 예뻐 보여서." "그런 말은 매일 하시잖아요." "매일 사실이니까." 태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며 그녀의 어깨 너머로 끓고 있는 국을 들여다보았고, 서연은 그 뻔뻔한 대답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 남자는 이런 말을 어쩜 저렇게 태연하게 하는 걸까, 생각하면서도 서연은 국자를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두 사람의 다정한 대화 소리에 부엌 밖에서 인기척이 났고, 서연이 고개를 돌리자 하은이 문틈으로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잠에서 덜 깬 얼굴로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서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어린아이 같아서, 서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모, 저도 배고파요." 하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부엌 안으로 쪼르르 들어왔는데, 그 순진한 얼굴을 보는 순간 서연은 어젯밤의 편지가 새삼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저 어린애가 뭘, 하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술렁였다.
하은은 서연이 친언니를 잃고 오 년째 딸처럼 키워온 아이였다. 열여덟이 된 지금도 여전히 어린 티가 남아 있어서, 밥그릇을 안고 조잘거리는 모습이나 반찬 투정을 부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서연은 애틋한 마음이 앞섰다. 저런 순진한 아이가 무슨. 서연은 고개를 저으며 하은의 몫으로 밥을 한 그릇 더 펐고, 국그릇에 두부를 유독 많이 담아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모부, 오늘 회의 있으시댔죠?" 하은이 수저를 들며 태준을 향해 물었고, 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오후에 지방 출장이 있어서 좀 늦을 거야." "조심히 다녀오세요." 하은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별다를 것 없는 대화였다. 정말 별것 아닌, 흔한 아침 인사였는데도 서연은 그 짧은 눈빛 교환에서 미세한 위화감을 느꼈다.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간 것 같은. 아니, 착각이겠지. 서연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국그릇을 상 위에 올렸다. 요즘 잠을 설쳐서 예민해진 걸 거야, 하고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식사가 끝난 후, 태준은 출근 준비를 하러 방으로 들어갔고, 하은은 학교에 갈 채비를 하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가방을 챙기고 교복 매무새를 다듬는 소리, 계단을 오르내리는 발소리가 집 안을 채우는 동안, 서연은 홀로 부엌에 남아 설거지를 시작했다.
* * *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물소리와 함께 규칙적으로 울리는 가운데, 서연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원의 단풍나무가 붉게 물들어가는 모습이 유독 쓸쓸하게 느껴졌는데, 매년 보던 풍경인데도 올해는 어쩐지 그 붉음이 더 짙게 다가왔다. 마치 무언가를 예고하는 것처럼.
"마님, 차 좀 드릴까요?" 박순정이 다가와 물었다. 서연이 열 살 때부터 곁을 지켜온 그녀는, 이제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잔주름이 많이 늘었지만 여전히 다정한 그 목소리에, 서연은 마음이 조금 놓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정이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붓고 국화차를 우려내는 동안, 서연은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식탁 의자에 앉았다. 은은한 국화 향이 부엌 안에 퍼지자, 서연은 잠시나마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순정아, 나 이상한 거 하나 물어봐도 돼?" 서연이 조심스레 입을 열자, 순정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서연은 잠시 망설였다. 이걸 물어봐도 되는 걸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어젯밤부터 가슴 한구석에 얹혀 있던 그 불편함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아니, 그냥…… 요즘 태준씨랑 하은이랑, 좀 이상하지 않아?" 서연이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순정의 얼굴에 아주 짧은 순간 무언가 스쳐 지나갔지만, 서연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순정이 애매하게 웃으며 답했고, 그 웃음이 평소보다 조금 더 길게 이어졌다는 것도, 서연은 알아채지 못했다. 서연은 그 말에 안도하며 다시 마음을 놓았다. 그래, 내가 너무 예민했나 봐. 서연은 국화차를 한 모금 삼키며 어젯밤의 편지를 서랍 속에 묻어두기로 결심했다.
"밥은 다 챙겨 드셨어요?" 순정이 화제를 돌리듯 물었고,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응, 오늘도 잘 먹었어."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창밖의 단풍나무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하나둘 떨어지는 모습이, 어쩐지 오래도록 눈에 밟혔다.
그러나 그 결심은, 앞으로 며칠 지나지 않아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할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