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환갑 부장님, 몬스터로 부활

2화

격리탑에서의 셋째 날이었다. 날짜를 세는 건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할 게 없어서였다. 창밖 하늘은 오늘도 회색이었고, 뾰족한 첨탑들은 오늘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방 안엔 침대 하나, 책상 하나, 그리고 나. 정확히는 이 거대한 몸을 구겨 넣은 나.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침대가 부서질 것 같아서, 나는 대체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게 감옥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근데 여자—여은채라는 이름을 그날 밤에서야 알았다—는 이걸 자꾸 연구실이라고 불렀다. 식사는 하루 두 번, 문 아래 작은 틈으로 들어왔다. 사람 몸집의 열 배는 되는 걸 채워야 하니 양이 어마어마했는데, 그마저도 부족했다. 배가 고팠다. 이 거대한 위장은 하루 종일 뭘 채워도 만족을 몰랐다. 거기다 하루에 세 번씩, 그녀는 내 몸 이곳저곳을 재고 적고 가끔은 손끝으로 찔러 보기까지 했다. 아프냐고 물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여기 뭐 하는 곳이라고 했죠." "소환 마법 연구실." "근데 왜 나까지 갇혀 있는데요." "연구 대상이니까." 무심한 대답이었다. 이 여자는 나를 사람이 아니라 실험 재료 정도로 보는 게 분명했다. "저기, 은채 씨." "현자님이라고 불러." "……현자님. 저는 원래 그냥 회사원이었습니다." 그녀는 책을 넘기던 손을 멈췄다. "회사원." "네. 무역회사 부장이요. 육십 넘게 야근하고 출근하다가, 트럭에 치여서 죽었습니다. 그러다 여기서 눈 떴고요." "……." "그날도 야근이었어요. 팀장이 갑자기 잡은 회식 때문에 막차를 놓쳤죠. 걸어서 집에 가다가, 신호도 제대로 안 보고 뛰어드는 트럭한테 그대로." 말하다 보니 웃음이 났다. 죽는 순간까지도 야근 핑계였다니. 인생 참, 뭐 하나 제대로 끝난 게 없었다. "제 목표는 딱 하나예요. 원래 몸으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주 짧게, 정말 짧게. 하지만 그 정도면 뭔가 걸리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 "그건 불가능해." "왜요." "세계를 넘나드는 마법은 이론상으로만 존재해. 실제로 성공한 적은 없어." "그럼 저는 어떻게 여기 온 겁니까." "……실수였어." 그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낮아졌다. 방어적인 태도가 아니라, 뭔가를 짓누르는 태도였다. "나는 원래 다른 세계와 연결되는 좌표를 찾고 있었어. 그 세계에 존재하는 마력원을 이쪽으로 끌어오려고 한 거지. 근데 소환진이 계산보다 커졌고, 사람 하나가 통째로 끌려왔어. 살아 있는 사람이었어. 그러다……" 말이 끊겼다. 이어지지 않았다. "제가 죽었죠." "……내 실수야." 인정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결국은 인정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화가 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이미 죽은 걸 어쩌겠나. 화낸다고 원래 몸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이라면 보통 이 상황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벽을 치거나, 뭐라도 해야 정상 아닌가. 근데 나는 그냥 배가 고팠다. 그리고 좀 궁금했다. 이 여자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가. "됐고, 그럼 이제 뭘 할 겁니까." "뭘 하다니." "저 이렇게 만들었으면, 책임지셔야죠."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예상 못 한 반응이었던 모양이다. 손에 쥐고 있던 깃펜이 스르륵 미끄러져 책상 위로 떨어졌다. "……지금 나한테 책임지라고 했어?" "네." "내가 왕국 현자야." "그러니까 더 책임지셔야죠. 힘 있는 사람이 사고 쳤으면 그게 더 크게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말이 되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뱉었다. 사실 회사에서도 늘 그렇게 배웠다. 사고는 직급이 높은 사람이 치든 낮은 사람이 치든, 수습은 결국 힘 있는 쪽 몫이라고.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깃펜을 다시 주워 드는 손이, 아주 조금 떨리고 있었다. · 나는 여은채다. 왕국 최고 현자, 라고들 부른다. 사실 그 호칭이 나는 별로 좋지 않다. 최고라는 말은 늘 뒤에 기대치를 매달고 오니까. 그리고 그 뒤에는 항상 다른 말이 붙었다. 최고의 현자인데, 왜 저렇게 생겼지. 최고의 현자인데, 왜 수염이 있지. 나는 태어날 때부터 마력에 예민했다. 열 살에 이미 왕궁 마법사들이 못 풀던 문제를 풀었고, 스무 살에 왕국 유일 현자 자리에 올랐다. 대단한 일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외로운 일이었다.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사람들은 나를 괴물처럼 대했다. 드워프라는 이유로, 수염이 있다는 이유로. "현자님은 참, 재주는 아까운데 얼굴이……" 그런 말을 스무 번쯤 들으면 나중엔 웃으면서 넘길 수 있게 된다. 스물한 번째부터는, 그냥 안 듣는 척하는 게 편했다. 나는 늘 다른 세계를 궁금해했다. 여긴 마법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는데, 마법이 없는 세계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세계라면, 나 같은 존재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수염이 있어도, 키가 작아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세계. 그 순진한 상상 때문에 소환진을 짰다. 몇 달을 매달려서 좌표를 계산하고, 마력 회로를 그렸다. 성공하면 다른 세계의 마력원 하나를 끌어올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실패해도 잃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과가, 저 남자였다. 이정호. 사람 하나를 죽여서 만들어낸 몬스터. 소환진이 열리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예상보다 몇 배는 큰 빛이 솟았고, 좌표가 어긋났다는 걸 그때 알았다. 뭔가가 걸렸다는 감각이 손끝에서부터 올라왔다. 마력 반응이 너무 컸다. 살아 있는 생명체 하나가, 통째로 넘어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멈추려 했지만 늦었다. "책임지셔야죠." 그 말이 자꾸 머릿속에서 되풀이됐다. 책임. 나는 뭘 책임져야 할까. 죽음을 되돌릴 수는 없다. 원래 몸을 돌려줄 수도 없다. 세계를 넘나드는 마법 자체가 이론에만 존재한다는 걸, 나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뭐라도, 저 남자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깃펜을 고쳐 쥐었다. 책상 위에 쌓인 소환 이론서들을 다시 펼쳤다. 처음부터, 좌표 계산부터 다시 짜야 할 것 같았다. 문제는, 이걸 왕궁에 알리는 순간 내 목이 먼저 날아갈 거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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