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카드 뽑았더니 인생역전이라니

3화

포장지가 완전히 벌어지자, 안에서 작은 카드 다섯 장이 미끄러져 나왔다. 손이 떨렸다. 카드 뒷면은 매끈했다. 은박 무늬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그 반짝임을 보고 있자니, 통장에서 빠져나간 백만 원의 숫자가 눈앞에 겹쳐 보였다. '진짜 이거 맞나.' 몇 번이고 되물었던 질문이었다. 카드 한 장 한 장을 손에 쥐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첫 번째 카드를 뒤집었다. [F랭크 - 슬라임] "아." 나는 짧게 탄식했다.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막상 눈앞에서 확인하니 속이 쓰렸다. 슬라임이라니. 게임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가장 흔하고 가장 약한 몬스터의 대표주자였다. 두 번째 카드도 뒤집었다. [F랭크 - 임프] 역시나였다. 붉은 피부에 작은 뿔이 달린 조그마한 악마의 그림. 그림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등급이 등급이었다. 세 번째, 네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각각 F랭크와 E랭크. 김중호 씨가 미리 말해준 대로, 대부분은 낮은 등급이었다. "이 정도면 그래도 평균은 되는 거예요." 카운터 너머에서 김중호 씨가 위로하듯 말했다. "E랭크 하나 나온 것도 나쁘지 않아요. 한정팩 열 명 중 여섯, 일곱은 전부 F만 뜨거든요." 위로치고는 조금 씁쓸한 위로였다.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카드는 한 장. 나는 그 카드를 손에 쥔 채, 잠시 눈을 감았다. '이번에도 F랭크겠지.' 어쩐지 그런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백만 원. 몇 달간의 야간 알바. 다리가 후들거리도록 서 있던 그 수많은 밤들. 편의점 야간 조에서 졸음을 쫓으려 찬물로 세수하던 새벽도, 물류센터에서 박스를 나르다 허리를 삐끗했던 날도, 전부 이 카드 한 장을 사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 모든 게 이 마지막 카드 한 장에 걸려 있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나는 눈을 뜨고 카드를 뒤집었다. 순간, 카드 표면이 미세하게 빛을 냈다. 번쩍- [알림 - 카드 등급 확인 중···] 메시지가 눈앞에 떠오르는 순간, 나는 숨을 삼켰다. 카드 주변으로 옅은 빛의 입자들이 소용돌이치듯 피어올랐다. 지금까지 뒤집었던 네 장의 카드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반응이었다. 김중호 씨의 눈이 커졌다. "어어?" 그가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 [C랭크 - 업동이] "뭐···?"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C랭크. 한정팩에서도 나오기 힘들다고 했던 그 등급. 매장에 들어오기 전, 김중호 씨가 몇 번이나 강조했던 말이 떠올랐다. "C랭크 이상은 진짜 로또예요, 로또. 백 명 중에 한둘 나올까 말까." 그 로또가 지금, 내 손안에 있었다. 김중호 씨가 카운터 밖으로 몸을 내밀며 카드를 확인했다. "이거, 이거 진짜 C랭크네요." 그의 목소리가 살짝 커졌다. "학생, 축하해요. 이거 진짜 운이 좋으셨어요." 그의 손끝이 카드 위를 조심스럽게 스쳤다. 마치 진품 여부를 확인하는 감정사처럼, 그는 카드를 몇 번이나 빛에 비춰봤다. 나는 카드를 손에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끝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카드 속에는 검은 긴 머리를 가진 소녀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화풍은 어딘가 화사하면서도 은근한 분위기를 풍겼고, 눈매는 또렷했다. 표정은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어딘가 장난기가 숨어 있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림 속 소녀의 시선이 왠지 나를 정확히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업동이라니, 이름부터 특이하네요." 김중호 씨가 흥미로운 얼굴로 말했다. "이 카드는 저도 처음 봐요. C랭크치고 유통량이 적은 카드인 것 같은데." 그는 뒤편 서랍에서 두꺼운 카드 도감을 꺼내 뒤적이기 시작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빨라졌다. "어, 여기 있네요. 업동이. 근데 정보란이 거의 비어 있어요." 그가 도감을 내 쪽으로 돌려 보여줬다. 정말이었다. 이름과 등급만 적혀 있을 뿐, 나머지 칸은 텅 비어 있었다. "이 카드는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나요?" 그가 카드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음, 보통 카드에는 기본 정보가 적혀 있는데, 이건 능력치 표시가 거의 없어요. 이런 경우가 종종 있는데, 대부분 개성이 강한 개체라서 능력을 스스로 숨기고 있는 카드들이에요." "숨기고 있다고요?" "네. 소환주와의 관계나 상황에 따라 능력을 드러내는 타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처음엔 뭘 할 수 있는지 잘 모를 수도 있어요." 그가 도감을 덮으며 덧붙였다. "이런 애들이 오히려 나중에 대박 나는 경우가 많아요. 능력이 안 보인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대박이라는 말에 마음이 조금 부풀었다가, 곧 가라앉았다. 지금 당장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카드를 다시 한번 들여다봤다. 검은 머리 소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무표정 속에 담긴 감정을 읽어보려 했지만, 알 수 없었다. [알림 - 계약 가능 상태입니다. 계약을 진행하시겠습니까?]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나는 순간 숨이 멎었다. '계약이라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계약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무겁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김중호 씨가 옆에서 조용히 설명했다. "카드를 뽑는 것과 계약은 별개예요. 계약을 해야 정식으로 소환주가 되고, 모험가 등록도 그때부터 진행할 수 있어요." "지금 해도 되나요?" "물론이죠. 대신 한번 계약하면 취소가 안 됩니다. 신중하게 결정하세요."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한마디 더했다. "저야 뭐, 좋은 카드 나왔으니까 어서 계약하시라고 부추기고 싶지만··· 그래도 이건 학생 인생이 걸린 일이니까요." 그 말이 오히려 더 무겁게 다가왔다. 나는 잠시 카드를 바라봤다. 이미 백만 원을 걸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지금 물러선다면 그동안의 밤들이 전부 헛수고가 될 것 같았다. "계약할게요." 목소리가 스스로 듣기에도 단단하게 들렸다. [계약을 진행합니다···] 카드가 손안에서 은은한 빛을 뿜기 시작했다. 파앗- 따스한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마치 누군가의 체온이 카드를 통해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순간, 카드에서 작은 인영이 흘러나왔다. 안개처럼 흩어지던 형체가 서서히 사람의 모습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스으으- 공기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검은 긴 머리, 그리고 카드 그림과 똑같은 무표정한 얼굴. 작은 체구의 소녀가 매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김중호 씨가 놀란 얼굴로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이야, 실체화까지 되네요. 이거 흔한 일이 아닌데." 그의 목소리에는 순수한 감탄이 섞여 있었다. "저도 이 매장 오 년째 운영하는데, 이런 건 몇 번 못 봤어요." 소녀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나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 시선이 마치 나를 위에서 아래로 훑는 것처럼 느껴졌다.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그리고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나를 뽑았어?" "어, 네." 나는 얼떨결에 존댓말로 대답했다. 소녀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업동이야. 그렇게 부르면 돼." "강태호입니다." "강태호." 그녀는 내 이름을 조용히 되뇌고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 짧은 되뇜이 어쩐지 이름을 새겨넣는 것처럼 느껴졌다. 매장에 있던 다른 손님들 몇몇이 이쪽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저거 뭐야, C랭크?" "실체화까지 되네, 진짜 신기하다." "저 학생 완전 로또 맞았네." 작은 소란이 일었다. 누군가는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려는 듯 이쪽을 향해 렌즈를 들었다. 김중호 씨가 손을 저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자, 자, 다들 구경 그만하시고. 학생, 이쪽으로 오세요. 등록 절차를 도와드릴게요." 나는 업동이를 데리고 카운터 안쪽으로 이동했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업동이는 아무 말 없이 내 뒤를 따라왔다. 그녀의 발소리는 이상하게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마치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것처럼, 조용하고 가벼운 걸음이었다. 등록 창구 앞에 앉아, 나는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손이 아직 떨리고 있었다. 백만 원짜리 도박이 실제로 성공한 것이다. '이제 시작이구나.' 서류 상단에는 소환주 이름과 계약 개체명을 적는 칸이 있었다. 강태호. 업동이. 두 이름을 나란히 적어 넣으며, 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나는 그저 통장 잔고를 걱정하던 백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은 서류 위에 소환주라는 신분으로 이름을 적고 있었다. 서류를 작성하던 중, 문득 옆에 앉은 업동이를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그게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보는 그 눈빛에는, 어딘가 낯선 세상을 처음 마주한 듯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저, 업동이 씨." "업동이면 돼. 씨 붙이지 마."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그 딱딱한 말투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 "업동아, 그럼." "응." 짧은 대답. 그녀는 여전히 창밖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앞으로 잘 부탁해." 그녀는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아주 미세한, 알아채기 힘든 웃음이었다. 찰나에 스치듯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진, 그런 웃음이었다. "두고 보고 판단할게." 그 말이, 어쩐지 등록 서류의 문구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서류에는 계약 조건과 책임 소재가 잔뜩 적혀 있었지만, 그 어떤 문장도 지금 그녀의 한마디만큼 나를 긴장시키지는 못했다. 김중호 씨가 서류를 훑어보며 도장을 찍었다. "자, 이제 정식으로 등록됐네요. 강태호 씨, C랭크 계약 소환주. 흠, 이거 조합 좋은데요?" 그가 웃으며 서류를 건넸다. 나는 서류를 받아들며 옆에 앉은 업동이를 다시 한번 힐끔 바라봤다. 그녀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이 세계에 완전히 발을 들이기 전,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가늠하고 있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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