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카드 뽑았더니 인생역전이라니

2화

편의점 알바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몸으로 깨달았다. 돈을 모으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지루하고 느리다는 걸. 하루 네 시간, 시급은 몇천 원 수준. 한 달을 꼬박 채워도 손에 쥐는 건 몇십만 원이 고작이었다. 매일 밤 열 시부터 새벽 두 시까지, 나는 계산대 뒤에 서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몇 번이나 하품을 참았는지 셀 수도 없었다. 편의점 사장님은 나이 지긋한 아저씨였는데, 처음엔 학생이 이렇게 늦게까지 일하냐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학생, 학교는 안 다녀?" "다녀요. 낮에요." "체력 괜찮겠어?" "괜찮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매일 밤 집에 돌아가면 몸이 부서질 듯 무거웠다. 하지만 그런 티를 낼 수는 없었다. "태호야, 오늘도 알바야?" 이동하가 신발장 앞에서 물었다. "응. 야간까지 넣었어." "뭐 하려고 그렇게 무리해." "그냥, 필요해서." 나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아직 남에게 말하기엔 너무 부끄러운 목표였기 때문이다. 모험가가 되겠다는 말, 그것도 카드팩을 뽑아서, 라는 계획. 서준영이라면 분명 웃으며 놀릴 게 뻔했다. '태호 너, 그거 완전 도박이잖아.' 그 말이 벌써부터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아서, 나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밤이 되면 나는 계산대 뒤에 서서 손님을 맞았다. "삼각김밥 두 개랑 우유 하나요." "네, 오천오백 원입니다." 손님들이 들고 나가는 물건들, 계산대에 찍히는 숫자들. 그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나는 매일 조금씩 통장 숫자를 늘려갔다. 가끔 손님이 없는 시간이면 나는 핸드폰으로 모험가 길드 홈페이지를 들여다봤다. 카드팩 종류, 등급표, 후기 게시판. 사람들이 올려놓은 개봉 영상 속에서 F랭크 카드가 나올 때마다 댓글창은 웃음거리가 되어 있었다. '또 F냐 ㅋㅋㅋ', '이 정도면 그냥 복권 사는 게 나음'. 그런 댓글들을 볼 때마다 나는 조금 위축됐지만, 그래도 화면을 끄지는 않았다. 집에 돌아오면 아름이가 자주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오늘도 늦었네." "어, 알바가 좀 길어졌어." "힘들지 않아?" "괜찮아." 나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사실은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지쳐 있었지만, 그런 걸 아름이한테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아름이는 아직 중학생이었다. 부모님은 지방에서 일하시느라 자주 집을 비웠고, 사실상 내가 아름이를 챙기는 날이 많았다. 아침에 깨워주는 것도 나였고, 저녁에 라면이라도 끓여주는 것도 나였다. 그 애가 학교에서 놀림받지 않고, 남부럽지 않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 그게 언제부턴가 나를 움직이는 가장 큰 이유가 되어 있었다. '나라도 뭔가 되어야지.' 어느 날 밤, 편의점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봤다. 눈 밑이 시커멓게 그늘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다. 통장에는 백만 원이라는 숫자가 찍혔다. 그 숫자를 확인한 날, 나는 한동안 핸드폰 화면을 끄지 못했다. 숨이 조금 가빠졌다. 몇 달간의 밤들이 그 숫자 하나로 압축되어 있었다. 그날, 나는 학교가 끝나고 곧장 홍대입구역으로 향했다. 그곳에 모험가 길드 지부가 있다는 건 인터넷 검색으로 이미 알아둔 상태였다. 지하철 안에서 나는 계속 손끝을 매만졌다. 심장이 벌써부터 두근거리고 있었다. '진짜 가는 거야, 지금.'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되물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출구를 빠져나오자, 거대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전체에 걸린 커다란 배너에는 '모험가 길드 서울 서부지부'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입구를 지나는 사람들 중에는 화려한 장비를 갖춰 입은 이들도 있었고, 나처럼 어색하게 두리번거리는 사람도 섞여 있었다. 건물 앞에 서서 나는 잠시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봤다. 건물이 얼마나 높은지, 목이 아플 정도였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로비 안내판을 보니 카드샵은 5층이라고 적혀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심장이 조금씩 빨리 뛰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안에 같이 탄 사람들은 다들 익숙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상일 텐데, 나한테는 이 순간이 몇 달을 벼르고 벼른 일이었다. 5층에 도착하자 넓은 매장이 펼쳐졌다. 벽면 가득 진열된 카드팩들,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 나는 어디서부터 봐야 할지 몰라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매장 안에는 은은한 조명이 카드팩들을 비추고 있었고, 포장지마다 반짝이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떤 사람은 팩을 하나 사서 곧장 그 자리에서 뜯어보고 있었고, 옆에서 친구가 낮은 탄식을 내뱉는 소리도 들렸다. "뭘 찾으시나요, 학생?"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돌아보니 중년의 남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단정한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눈매가 유난히 따뜻해 보였다. "저, 카드팩을 좀 사려고요. 처음이라서 잘 모르겠어요." "아, 그러세요. 제 이름은 김중호입니다. 여기서 오래 일했으니 도움이 될 거예요." 김중호 씨는 진열대 쪽으로 나를 이끌며 설명을 이어갔다. "팩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뉩니다. 기본팩, 프리미엄팩, 그리고 한정팩." 그는 손가락으로 각각의 진열대를 가리켰다. "기본팩은 F랭크에서 D랭크까지가 대부분 나옵니다. 가격은 십만 원 안팎이고요." "프리미엄팩은요?" "D랭크에서 B랭크까지 확률이 조금 올라갑니다. 대신 가격도 오십만 원부터 시작하죠." "한정팩은요." "한정팩은 확률표가 따로 있는데, C랭크 이상이 나올 가능성이 아주 낮게 잡혀 있어요. 대부분은 여전히 낮은 등급이 나오고요. 가격은 백만 원부터입니다." 나는 잠시 계산을 해봤다. 통장에 있는 돈이 딱 백만 원이었다. "한정팩을 사면 딱 맞겠네요." "그렇긴 한데." 김중호 씨가 잠깐 말을 멈췄다. "학생, 이거 하나 알아두세요. 한정팩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카드가 나오는 게 아니에요. 확률이 조금 높다는 거지, 여전히 대부분은 낮은 등급이 나옵니다. 그리고 팩을 열고 나면 그 돈은 그대로 사라지는 거예요." "알아요." "진짜 신중하게 결정하셔야 해요. 백만 원, 그거 학생한테 적은 돈이 아니잖아요."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이 맞았다. 몇 달 동안 몸을 부수듯 모은 돈이었다.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서 있던 그 수많은 밤들, 삼각김밥과 우유를 계산하며 흘려보낸 시간들이 머릿속에 스쳤다. "그럼 저는 어떤 팩을 골라야 할까요?" 김중호 씨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정답은 없어요. 확률은 확률이고, 운은 운이니까요. 다만." 그는 진열대에서 팩 하나를 집어 들었다. 포장지 색이 다른 것들과 조금 달랐다. "이건 이번 달에 새로 들어온 시즌 한정팩입니다. 다른 한정팩보다 C랭크 확률이 아주 살짝 높게 설정돼 있어요. 대신 가격은 조금 더 비싸요." "얼마인데요?" "백만 원이요. 딱." 순간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마치 이 팩이 나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느껴졌다. 포장지에 새겨진 문양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별처럼 작은 반짝임들이 조명에 비쳐 흔들리고 있었다. "이걸로 할게요." "정말요?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확률이 조금 높다는 거지, 여전히 대부분은 F나 E랭크가 나올 거예요." "그래도, 이걸로 할게요." 김중호 씨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물었다. "혹시, 여기 오기까지 무슨 사정이 있으셨나요?" 나는 대답 대신 옅게 웃었다. "그냥, 저한테는 중요한 돈이라서요."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나는 지갑에서 통장 사본과 카드를 꺼냈다. 손이 살짝 떨렸다. 김중호 씨는 그런 나를 잠시 지켜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결제 도와드릴게요." 결제 단말기에서 삐- 소리가 울렸다. 화면에 뜬 금액과 잔액이, 백만 원에서 0원으로 바뀌는 걸 나는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그 순간 뭔가 속이 텅 비어버리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은 후련했다. 결제가 끝나고, 그는 팩을 조심스럽게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바로 여기서 개봉하실 건가요? 아니면 집에 가서?" 나는 팩을 손에 쥐었다. 포장지의 매끈한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생각보다 가벼웠다. 이 작은 종이 한 장이 몇 달간의 밤들과 맞바꾼 것이라는 게, 손끝의 감촉만으로는 믿기지 않았다. '이 안에 뭐가 들어 있을까.'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몇몇 사람들이 나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어린 학생이 한정팩을 사는 게 흔한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누군가 작게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저 나이에 저런 걸 사네." "운 좋으면 뭐라도 나오겠지." 나는 그런 시선들을 애써 무시했다. 지금 중요한 건 오직 이 손 안에 있는 팩 하나였다. "여기서 열어볼게요."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포장지의 봉인을 뜯기 시작했다. 손끝이 떨렸다. 몇 달간의 밤들이,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의 시간들이, 아름이의 얼굴이,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이 작은 포장지 안으로 몰려드는 것 같았다. 촤아악ㅡ 포장지가 갈라지는 소리가 매장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나에게 쏠렸다. 그 시선들 속에서, 나는 포장지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손끝에 카드 한 장의 매끈한 표면이 닿았다. '제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카드를 천천히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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