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결정을 손에 쥔 채 얼마나 서 있었는지 몰랐다.
시간이 흘렀다는 감각은 있었다. 하지만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결정의 표면은 여전히 차가웠다. 손바닥에 남은 냉기가 그것을 증명했다.
강도현은 발걸음을 옮겼다. 돌기둥이 늘어선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안개는 걷힐 듯 걷히지 않았다.
발밑의 감촉이 낯설었다. 흙도 아니고 돌도 아니었다. 그 중간 어딘가의 질감이었다. 밟을 때마다 발바닥에 미세한 진동이 올라왔다.
길은 좁아졌다가 넓어졌다가 했다. 좁아질 때는 양쪽 돌기둥이 어깨를 스칠 듯 가까워졌고, 넓어질 때는 시야 끝에서 안개가 다시 밀려왔다. 벽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점.
선.
물결.
탑.
원룸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문양이었다. 강도현은 그 앞에 멈춰 섰다. 손을 뻗어 만져보았다. 차가운 돌의 질감. 그 이상은 아니었다.
몇 번을 훑어도 감촉은 그대로였다. 문양의 홈을 따라 손끝을 움직여 보았다. 얕은 골이 손톱 끝에 걸렸다. 새겨진 지 오래된 것 같았다. 아니면 원래부터 거기 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강도현은 손을 떼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 했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안개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돌기둥들도 그대로였다. 착각이었을까. 하지만 발소리는 분명했다. 자갈을 밟는 듯한, 규칙적인 소리였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지나지 않아 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더 가까웠다.
강도현은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겁이 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끝은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결정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표면의 냉기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돌기둥 사이에서 사람 형체가 걸어 나왔다.
키가 크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얼굴은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걸음걸이에 소리가 거의 없었다. 훈련된 움직임이었다.
강도현은 반사적으로 발밑의 돌조각을 찾았다. 손에 쥘 만한 크기의 것이 발치에 있었다. 몸을 낮추며 그것을 집었다. 상대는 그 동작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누구십니까."
강도현이 먼저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형체가 한 걸음 다가왔다. 강도현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손에는 아직 돌조각이 있었다. 부족했다. 상대는 짐승과는 다른 부류였다.
짐승은 본능으로 움직였다. 이 형체는 그렇지 않았다. 걸음 하나, 시선 하나에도 계산이 있었다. 무언가를 재고 있다는 느낌이 짙었다.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강도현이 말했다.
형체가 걸음을 멈췄다. 처음으로 반응이 있었다.
"흥미롭군."
낮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성별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뭐가요."
"싸울 생각이 없다는 말. 이 관문에 그런 말을 하는 자는 드물다."
형체가 그늘에서 반쯤 걸어 나왔다. 눈이 보였다. 안개 속에서 강도현을 지켜보던 그 눈이었다.
숨이 멈췄다.
기억이 선명했다. 결정을 쥐기 전, 안개 속에서 자신을 관찰하던 그 시선. 그때는 실체가 없었다. 지금은 그 눈이 사람의 얼굴에 붙어 있었다.
"당신이었군요."
"보고 있었다는 것만 알아두면 된다."
"왜."
"관문의 규칙이다. 처음 온 자는 관찰당한다."
강도현은 손에 든 돌조각을 슬쩍 등 뒤로 숨겼다. 상대는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숨길 필요 없다. 그런 걸로는 나를 어쩌지 못한다."
"그럼 뭘로 어쩌면 됩니까."
형체가 잠시 침묵했다.
"질문이 많군."
"대답이 없으니까요."
짧은 정적이 흘렀다. 강도현은 그 정적 속에서 상대의 자세를 살폈다. 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몸 전체가 무기처럼 보였다. 손끝, 발끝, 어깨의 각도까지 모두 계산된 듯한 느낌.
체중은 앞발에 실려 있지 않았다. 뒤로도 아니었다. 정확히 중앙에 고정된 채, 언제든 어느 방향으로도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냥 서 있는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강도현의 눈에는 그 균형이 보였다. 몇 번의 위기를 넘기며 몸에 새겨진 감각이 그것을 읽어냈다.
"이름을 물어도 됩니까."
강도현이 다시 물었다.
"관문의 수호자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저는..."
"필요 없다. 이름은 관문 밖에서만 의미가 있다."
강도현은 입을 다물었다.
수호자가 천천히 원을 그리듯 움직였다. 강도현은 그 움직임을 따라 몸을 돌렸다. 서로 거리를 유지한 채, 두 사람은 마치 하나의 축을 두고 도는 것처럼 움직였다.
발밑의 진동이 계속되었다. 걸음마다 안개가 흔들렸다. 수호자의 그림자는 이상하게 짧았다. 빛도 없는 이 공간에서 그림자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질적이었다.
"짐승을 처리한 방식이 흥미로웠다."
수호자가 말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아니었지. 극속이 발현되는 순간, 몸의 중심이 정확히 남았다. 훈련받은 자의 균형이었다."
강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훈련받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균형이 어디서 왔는지는 자신도 몰랐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짐승과 마주쳤을 때, 몸이 먼저 움직였다. 생각보다 반응이 빨랐다. 마치 몸 어딘가에 이미 그 동작이 새겨져 있던 것처럼.
"질문이 하나 더 있다."
수호자가 말을 이었다.
"극의 자격을 여덟 개 모두 받았나."
"자격만 받았을 뿐입니다. 아무것도 선택한 적이 없어요."
"그럼 극속이 먼저 나온 것은."
"저도 모릅니다."
수호자가 처음으로 걸음을 멈췄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안개가 더 짙어지는 것 같았다. 강도현은 그 침묵을 견디며 상대의 눈을 마주 보았다.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강도현이 아니라 그 너머의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위기가 선택한다는 말이 사실이었군."
혼잣말처럼 들렸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강도현이 물었다.
수호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동작만으로도 상대가 무언가를 재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강도현은 이 대화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상대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통과시켜 줄 겁니까."
강도현이 물었다.
"통과는 시험이 아니다."
"그럼 뭡니까."
"생존이다."
그 한 마디가 공기를 다르게 만들었다. 강도현은 목덜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의 대화는 서론이었다. 진짜는 지금부터라는 것을, 몸이 먼저 알아차렸다.
"생존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호자가 손을 들었다. 그 순간 발밑의 흙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미세한 균열이었다. 발밑에서 가느다란 실선처럼 흙이 벌어졌다. 그 다음엔 소리가 났다. 낮고 둔중한,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소리였다.
강도현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늦었다.
바닥 전체가 무너지듯 내려앉았다. 균열이 거미줄처럼 퍼졌다. 발밑이 사라지는 감각이 들었다.
몸을 지탱하던 지면이 통째로 사라졌다. 손을 뻗어 뭔가를 붙잡으려 했지만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안개조차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어이—!"
외침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몸이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돌기둥들이 위로 멀어졌다.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손을 뻗어 뭐라도 붙잡으려 했지만 잡히는 것은 없었다.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소리는 날카로워졌다. 위장이 뒤집히는 듯한 감각이 뒤따랐다. 결정을 쥔 손만은 놓지 않았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것이었다.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시야 끝으로 스쳐 지나가는 벽면에는 여전히 같은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점. 선. 물결. 탑. 떨어지는 와중에도 그 문양들은 규칙적으로 반복되며 지나갔다. 마치 이 낙하 자체가 무언가의 경로처럼 정해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위쪽 균열 사이로 내려다보는 수호자의 눈이었다.
여전히 관찰하고 있는 눈이었다.
그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추락하는 강도현을 향해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구해줄 생각도, 말릴 생각도 없어 보였다. 관문의 규칙이라고 했던 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 통과는 시험이 아니다. 생존이다. 그 말의 무게가 이제야 몸으로 느껴졌다.
바람이 더 거세졌다. 아래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안개가 모든 것을 삼키고 있었다. 강도현은 눈을 감지 않았다. 감으면 끝일 것 같았다. 무엇이 끝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감각만은 분명했다.
떨어지는 몸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시야에 잡히던 수호자의 눈도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보이는 것은 온통 회색뿐이었다.
그리고 그 회색 속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