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마법소녀 메이커의 계약자

2화

알람 소리에 깼다. 눈을 뜨자마자 천장이 낯설었다. 하루가 지났는데도 이 몸에 완전히 적응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손발이었다. 알람을 끄는 손가락의 움직임, 이불을 걷어내는 다리의 각도, 그런 것들이 내 의식보다 먼저 움직였다. 몸에는 몸의 습관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이를 닦을 때도 그랬다. 칫솔을 쥔 손이 알아서 각도를 잡았고, 치약의 양도 정확했다. 머리를 묶을 때는 더 신기했다. 손끝이 저절로 머리카락을 갈라 쥐고, 고무줄을 세 바퀴 감았다. 나는 그냥 구경꾼이었다. 유하린의 몸이 유하린의 방식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고, 나는 그 안에 세입자로 들어앉아 있을 뿐이었다. 교복을 입고 거울 앞에 섰을 때, 다시 억울해졌다. 예뻤다. 눈매가 시원했고 콧대도 적당히 서 있었다. 피부는 뭘 발라도 좋을 것 같은 결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만든 캐릭터니까 예쁜 게 당연했다. 그런데 그 당연함이 내 얼굴이 되어 눈앞에 서 있으니, 실감이 완전히 다르게 왔다. 남의 작품을 감상하던 입장에서 그 작품 안으로 들어와 버린 느낌. 근사하다고 해야 할지, 무섭다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거울 속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낯선 표정으로. 익숙해질 것이다. 익숙해져야 했다. 이제 이게 내 얼굴이니까. 가방을 챙기다가 지갑을 열어봤다. 천 원짜리 몇 장, 동전 몇 개. 다 합쳐봐야 사천 원 남짓이었다. 방을 한 바퀴 둘러봐도 저금통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서랍을 열어봤지만 학용품과 화장품 몇 개,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적 같은 종이 한 장이 나왔을 뿐이었다. 가족사진은 없었다. 벽에도, 책상 위에도, 어디에도. 냉장고를 열어보니 즉석식품과 물병 몇 개가 전부였다. 누군가 대신 채워주는 냉장고가 아니었다. 스스로 채워야 하는 냉장고였다. 원작 설정을 머릿속으로 다시 뒤졌다. 유하린은 후견인 없이 자란 캐릭터였다. 부모가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서브 스토리 어딘가에 짧게 언급되어 있었을 뿐, 본편에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서브 히로인들이란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결핍 하나쯤 짊어지고, 그 결핍이 서사의 감정선을 만들어주는 소모품 같은 존재들. 시나리오를 짤 때는 그게 그냥 감성적인 장치였다. 이제는 현실이 됐다. 생계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무겁게 자리를 잡았다. 죽지 않는 것과 굶지 않는 것. 두 가지가 동시에 급했다. 사실 후자가 더 급했다. 습격이라는 거대한 위협은 아직 카운트다운 중이었지만, 배는 지금 당장 고팠다. 가방을 메고 현관을 나섰다. 신발장 위에 놓인 먼지 쌓인 화분이 유일하게 이 집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증거처럼 보였다. 등굣길, 편의점 앞을 지나면서 삼각김밥 진열대를 흘겨봤다. 계산하면 천오백 원. 아침을 걸러야 할지 말지 잠깐 고민했지만 결국 지나쳤다. 지금은 아끼는 게 맞았다. "유하린! 여기야, 여기!" 교문 앞에서 누군가 목청껏 손을 흔들었다. 갈색 단발머리에 명찰을 단 여학생이었다. '이단풍'. 몸이 알아서 반응했다. 입꼬리가 올라가고, 손이 마주 흔들렸다. 반가운 척하는 표정이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나왔다. "어제 왜 연락 안 받았어? 걱정했잖아." 이단풍이 다가와 팔짱을 끼려 들었다. 나는 살짝 몸을 비켜 그 손을 피했다. 아직은 남의 살가움이 낯설었다. "어, 그게…… 폰이 좀 이상해서." 적당히 둘러댔다. 사실 폰의 비밀번호도 모르는 상태였다. 가방 안에서 진동이 울릴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단풍은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그냥 넘겼다. "그래? 아무튼 다행이다.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지." 지나치게 상냥했다. 상냥함이 지나치면 오히려 의심이 드는 성격인데, 지금은 그 의심보다 다른 감정이 앞섰다. 이 세계에서 나를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유하린을 유하린으로 대해주는 사람. 지금 내겐 그게 절실했다. "참, 오늘 방과 후에 시간 있어? 조합에서 연락 왔거든." "조합?" 말이 목에서 걸렸다. 조합이라니, 학교에 조합이 왜 있나. 반응이 늦었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이단풍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진짜 이상하다, 오늘. 조합 몰라? 마법소녀 관리 조합." 마법소녀. 게임 화면 속에서, 기획서 안에서 수백 번 써봤던 그 단어가 다른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세계의 규칙을 다시 확인해야 했다. 이건 그냥 이세계가 아니었다. 내가 만든 세계였다. 그리고 그 세계에는 조직이라는 것이 있었다. 관리하고, 등급을 매기고, 보상을 주는 조직. "아, 그거. 요즘 정신이 없어서." "뭐, 이해해. 그럼 이따 같이 갈까?" "그래." 수업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칠판에 뭐가 쓰여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선생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몰랐다. 머릿속은 온통 조합이라는 단어와, 지갑 속 사천 원과, 텅 빈 냉장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방과 후, 이단풍이 앞장서서 학교 뒤편으로 향했다. 낡은 건물 3층. 겉으로는 평범한 학원 간판이 걸려 있었다. '해피랜드 영어수학'. 이름부터 수상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이단풍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여기 원래 진짜 학원이었는데, 몇 년 전에 폐업하고 조합이 그 자리를 인수했어. 간판은 그냥 눈속임이고." "눈속임이 왜 필요해?" "일반인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되니까. 우리 존재 자체가 비밀이잖아." 3층 문을 열고 들어서자 겉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벽 한쪽에는 커다란 게시판이 걸려 있었다. '이번 주 습격 발생 지역', '위험도 등급표', '보상 산정 기준'. 색색의 압핀으로 표시된 지도 위에, 붉은 동그라미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이건 학원이 아니라 재난 대응 본부였다. 학생들이 앉아서 문제집을 풀 자리에, 대신 낡은 철제 책상과 서류 더미가 쌓여 있었다. 담당자로 보이는 여자가 안쪽 자리에서 손을 흔들었다. "신규 등록자시죠? 이쪽으로 앉으세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내밀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위험도 낮은 건부터 배정해드릴게요. 오늘은 하급 습격 하나, 정찰 임무예요." "정찰이면 안전한 거죠?" "당연하죠. 등급 F예요. 나가서 사진 찍고 오면 끝이에요." 그녀의 웃음이 지나치게 매끄러웠다. 지나치게 매끄러운 웃음은 대체로 뭔가를 숨긴다는 뜻이었다. 회사 생활을 오래 하진 않았지만 그 정도는 알았다. 계약서에 작은 글씨로 쓰인 조항, 영업사원의 과장된 미소, 그런 것들과 이 여자의 웃음이 닮아 있었다. "보상은요?" "완료 시 오만 원, 위험수당 없음." 오만 원. 지금 내 지갑 사정에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액수였다. 삼각김밥 하나도 아끼던 처지에 오만 원이라니. 배고픔이 신중함을 이겼다. 아니, 정확히는 신중함이라는 게 애초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F등급이면 진짜 아무것도 안 나오는 거예요?" "통계적으로는요." 통계적으로는, 이라는 말이 걸렸다. 통계 밖의 예외라는 게 늘 존재하는 법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걸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할게요." 서류에 서명하는 손이 떨렸다. 볼펜 끝이 종이 위에서 몇 번 헛돌았다. 담당자는 그런 내 손을 잠깐 보더니 별말 없이 서류를 챙겼다. 이단풍이 옆에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봤다. "F등급이니까 괜찮을 거야. 근데 혼자 가는 건 좀……" "같이 가주면 되잖아." "나는 오늘 다른 임무가 있어서." 그녀가 시선을 피했다. 그 짧은 순간의 눈동자 흔들림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뭔가 있다는 뜻이었다. 이단풍처럼 눈치가 좋은 애가 저렇게 시선을 피할 때는, 대체로 말하지 않는 게 나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임무가 뭔데?" "그냥…… 좀 위험한 거. 신경 쓰지 마." 더 캐물으려 했지만 그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담당자 쪽으로 향했다. 대화는 그렇게 끊겼다. 나에게는 선택권이 별로 없었다. 오만 원과, D-데이로 다가오는 습격 카운트다운, 둘 다를 동시에 감당해야 했다. 어느 쪽도 미룰 수 없는 문제였다. 담당자가 서류에 도장을 찍고 주소를 건넸다. 낡은 지하철역 근처의 폐건물이었다. 지도를 보니 학교에서 걸어서 이십 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별거 없을 거예요. 그냥 확인만 하고 오시면 돼요." 그녀가 웃으며 종이를 접어줬다. 웃음의 각도가 처음 봤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카메라는 이걸로 찍으시면 돼요." 낡은 디지털카메라 하나를 건네받았다. 배터리가 몇 퍼센트나 남았는지 확인할 새도 없이 담당자는 다음 등록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단풍이 건물 입구까지 따라와 배웅했다. "진짜 조심해. F등급이라도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 "방금 안전하다며." "통계적으로." 똑같은 단어가 두 번째로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그냥 웃음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지하철역 근처 폐건물로 걸어가는 동안, 오만 원과 사진 몇 장이라는 단순한 셈이 머릿속을 채웠다. 별거 없을 거라는 말이, 나중에 되짚어보니 이 세계에서 가장 불길한 말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삼층짜리 회색 콘크리트 건물, 창문이 대부분 깨져 있고 외벽에는 알아볼 수 없는 그래피티가 얼룩처럼 번져 있었다. 입구를 막고 있던 철제 셔터가 반쯤 올라간 채 멈춰 있었고, 그 아래로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카메라를 목에 걸고, 나는 그 어둠 속으로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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