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35세, 얼떨결에 대마법사

4화

다들 문 앞에서 나를 쳐다봤다. 설명을 기다리는 표정들이었다. 박 과장님은 이미 신발도 못 벗고 현관에서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재민이는 핸드폰을 든 채 112를 누를지 119를 누를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뇌가 미친 듯이 돌아갔다. 귀신 들린 집이라고 하면 다들 도망갈 것 같고, 창고에 실험용 가스가 있다고 하면 더 무서워할 것 같고, 사실은 조카가 인공생명체고 고양이가 말을 한다고 하면 그날로 정신병원 이송이었다. 머릿속에서 온갖 시나리오가 배달앱 광고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저기, 사실은요.” 말을 꺼내는 동시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쾅! 은하가 먼저 튀어나왔다. “도현님, 걱정 마세요. 제가 처리했습니다.” 목소리는 차분했고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 마치 프레젠테이션을 완벽하게 준비한 인턴 같았다. 방 안을 슬쩍 보니 아까 정리해뒀던 낡은 책장 하나가 그냥 넘어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그냥 넘어진 책장이었다. 방금 전까지 눈부신 빛을 뿜어대던 자물쇠 따위는 흔적조차 없었다. “저, 저기 책장이 넘어진 거였어? 그럼 그 빛은?” 은하가 아무렇지도 않게 손에 든 야광 스티커 묶음을 흔들어 보였다. 촤르르르륵! 스티커 뭉치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오래된 야광 스티커가 습기를 먹어서 반응한 것 같습니다. 재민 씨 말씀이 맞았습니다.” 뭐야, 진짜로 야광 스티커였다고? 나조차도 순간 헷갈릴 정도로 태연한 연기였다. 저 조카는 나중에 배우를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진지하게 들었다. 아니, 애초에 인간이 아니니까 연기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의 본질에 더 가까운 걸지도 모르겠다. 박 과장님이 안심한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이고, 놀랬네. 근데 저 은하가 은근 야무진데?” “제 조카가 좀 그런 편이에요.”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등에 흐른 식은땀을 닦았다. 셔츠가 축축했다. 마트 계약직으로 살면서 이런 식으로 땀을 흘려본 적은 없었는데, 오늘 하루로 그 기록이 갱신됐다. [시편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를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의인은 아니고 그냥 거짓말을 잘하는 조카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여호와가 아니라 은하가 나를 건졌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뭐 어쩌겠나. 신도 가끔은 조카 몸을 빌려 일하시는 거겠지. 동료들은 그날 밤 늦게까지 놀다가 돌아갔다. 박 과장님은 가기 전까지 은하의 손재주를 세 번이나 칭찬했고, 재민이는 다음에 또 놀러 와도 되냐고 벌써 물어봤다. 그 순간 나는 속으로 절규했다. 제발, 제발 다음은 없기를. 집이 완전히 조용해진 뒤, 나는 은하와 미르를 마주 앉혔다. 거실 조명 아래, 인공생명체와 말하는 고양이를 앞에 두고 훈화를 하는 이 그림이 얼마나 웃긴지는 본인들도 모를 것이다.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안 돼. 우리 조심하자.” 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방심했습니다. 위장 결계를 더 강화하겠습니다.” “NYA, 근데 씨는 왜 이렇게 태평하냥? 보통 사람이면 지금쯤 뒤로 넘어갔을 텐데.” 미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살폈다. 고양이 눈이 저렇게 사람 속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말하는 고양이, 자칭 인공생명체, 빛나는 자물쇠, 이 모든 게 하루 만에 일어났는데 나는 이상하게 별로 안 놀랐다. 그냥 원래 이런 거려니, 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어쩌면 나는 태생부터 무던한 인간인 걸까. 아니면 회사에서 워낙 별의별 갈굼을 다 받아서 이제 웬만한 충격에는 내성이 생긴 걸까. 둘 다인 것 같았다. 사실 팀장님한테 매출 보고서 자리에서 인격 모독을 당해본 사람이라면, 고양이가 말을 걸어오는 정도는 그렇게까지 충격적이지 않다. 순위를 매긴다면 팀장님이 훨씬 위였다. “근데 미르야,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뭐냥?” “할아버지는 정확히 뭘 하고 계셨던 거야?” 은하와 미르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 짧은 순간, 두 존재 사이에 뭔가 무거운 합의가 이루어진 것 같았다. “강만수 님은... 마법사였습니다. 신으로부터 능력을 받아 이세계로 향하는 문을 여신 분이셨습니다.” “신? 이세계?” 갑자기 스케일이 너무 커졌다. 방금까지 야광 스티커 드립으로 넘어가던 분위기에서 갑자기 창세기급 서사로 점프하는 건 너무 급발진 아닌가. “그리고 도현님께는 그 재능이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나한테? 나 그냥 마트 계약직인데.” 은하가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강만수 님께서는 도현님이 태어날 때부터 마력을 감지하셨습니다. 다만 그 힘을 봉인해두셨을 뿐입니다.” “봉인?” “네. 도현님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할아버지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게. 농담이다. 그보다는 마력이라는 단어가 너무 게임 같아서 웃음이 났다. 마력 봉인이라니, 이거 무슨 육성형 모바일게임 튜토리얼 아닌가. 다음 대사는 분명 “지금부터 각성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였을 거다. “그럼 그 마력은 지금 어디 있는데?” 미르가 내 손을 앞발로 툭 쳤다. “여기 있다냥, 씨 몸속에.” “그럼 그거 어떻게 꺼내는데?” “그건 씨가 직접 느껴봐야 안다냥.” 선문답 같은 대답이었다. 절에서 스님한테 인생 상담받으러 갔다가 “네 마음속에 답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냥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때도 짜증났고 지금도 짜증났다. 어쨌든 그날 이후 나는 매일 밤 은하와 미르에게 마법 기초를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다. 첫날은 그냥 손바닥을 마주 보고 앉아서 “마력을 느껴보세요”라는 말만 들었다. 둘째 날은 촛불 하나를 앞에 두고 눈을 감으라고 했다. 셋째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며칠이 지나도 촛불은 얌전히 자기 자리에서 흔들릴 뿐이었다. 촛불 하나 켜는 것도 실패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는 회사 일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재고 정리 하나 시켜도 엑셀 수식 틀려서 재민이한테 열두 번은 지적받는 인간인데, 마법이라고 다를 게 있겠나. “씨, 좀 더 집중해야 한다냥. 마력은 의지에 반응한다냥.” “나 지금 엄청 집중하고 있는데?” “그건 집중이 아니라 그냥 눈 감고 있는 거다냥.” 미르는 매번 그런 식으로 팩폭을 날렸고, 은하는 그 옆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인공생명체와 고양이 앞에서 매일 밤 자존감이 깎여나가는 이 상황이, 생각해보면 웃기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 며칠 뒤, 마트에서 사고가 터졌다. 평범한 근무일이었다. 오전 물류 검수를 마치고 재고 창고에서 박스를 옮기던 중이었다. 창고 안쪽 선반은 원래도 낡아서 삐걱거린다는 말이 몇 번 나왔던 곳이었다. 총무팀에 보수 요청을 넣었지만 늘 그렇듯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재고 창고 선반이 무너지면서 내가 그 아래 깔릴 뻔한 사고였다. 쾅! 무거운 철제 선반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선반 위에 쌓여 있던 생수 박스들이 우르르 쏟아지는 게 눈에 보였고, 그 아래 나는 그냥 서 있었다. 도망칠 생각조차 못 했다.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으니까. 그 순간,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손을 뻗은 순간, 손끝에서 뭔가 파앗! 하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선반이 그대로 공중에서 멈췄다. 주변에 있던 재민이와 몇몇 직원들이 그 광경을 그대로 목격했다. 다들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창고 안이 순식간에 정지 화면이 됐다. [출애굽기 14:21, 바다가 물러가고 바다가 마른 땅이 되니] 바다가 물러간 건 아니고 그냥 선반이 멈춘 거지만, 성경 구절 갖다 붙이니까 뭔가 있어 보이긴 했다. 모세는 지팡이로 바다를 갈랐다는데 나는 마트 창고에서 생수 박스 무너지는 걸 손짓으로 막은 거니, 스케일이 조금 초라하긴 해도 원리는 비슷한 거 아닐까. 아니, 전혀 안 비슷하다. “도, 도현 씨... 방금 뭐예요?” 재민이 목소리가 떨렸다. 손에 든 박스도 같이 떨리고 있었다. 나도 내 손을 보며 얼음이 됐다. 뭐지, 방금 그거. 선반은 여전히 공중에 떠 있었다. 무게로만 따지면 저게 지금 내 시급으로 감당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계약직 월급으로는 저 선반 하나 배상도 못 할 텐데, 지금 그게 공중에 둥둥 떠 있다. 내가 손을 내리자 그대로 쿵, 바닥에 떨어졌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방금 내가 뭘 한 거지? 창고 안에는 아무도 말이 없었다. 다들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이번에는 야광 스티커 같은 허접한 변명으로 넘어갈 수 있는 종류가 아니라는 걸,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감각으로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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