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35세, 얼떨결에 대마법사

1화

삼십오 년을 살아오면서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다. 인생은 대형마트 시식 코너 같다는 것. 공짜인 척 다가오지만 결국 카트에 뭔가를 담게 만든다. 시식 코너 아주머니가 웃으면서 소시지를 내밀 때, 그 웃음 뒤에 숨은 매출 압박을 아는 사람만이 인생의 진리를 논할 자격이 있다. "강도현 씨, 정육 코너 재고 확인했어?" 박 과장님 목소리가 스피커보다 크게 울렸다. 저 인간은 마이크가 없어도 매장 끝에서 끝까지 목소리가 전달되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차라리 방송실에서 일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굳이 나를 찾아와서 소리를 지르는 이유는 아마도 표정을 보고 싶어서일 거다. 사람 괴로워하는 표정 보는 게 취미인가. "확인했습니다." "확인했는데 왜 삼겹살이 없어!" [전도서 1:9,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그래, 이 갈굼도 새 것이 아니다. 어제도 똑같은 걸로 혼났다. 그저께도, 그끄저께도. 아마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로 정육 코너 재고는 늘 부족했을 것이다. 이건 성경에도 나올 법한 진리다. 구약시대에도 삼겹살 재고가 부족했을 거라 확신한다. 서른다섯 살, 대형마트 남자 직원, 만년 계약직. 부하도 있고 상사도 있는데 정작 내 자리는 없는 느낌이랄까. 회의실에 내 이름 적힌 명패 하나 없고, 명찰에도 "강도현"이라는 이름 옆에 작은 별표가 붙어있다. 그 별표가 무슨 뜻인지 아직도 모른다. 아무도 안 알려준다. 부하 직원인 스무 살 알바생 재민이는 나를 볼 때마다 은근히 눈을 피했다. 왜냐하면 나는 재민이한테 갈굼당한 걸 그대로 재민이한테 넘기는 부류의 인간이었으니까.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재민아, 저기 유통기한 지난 우유 좀 빼." "어, 형. 아까 뺐는데요." "다시 확인해." 재민이는 한숨을 푹 쉬면서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에서 어쩐지 나의 이십 대가 겹쳐 보였다. 나도 저랬겠지. 갈굼당하고 억울해하고, 그러다 결국 갈구는 쪽에 서게 되고. 인생이란 게 그런 거다. 갈굼의 릴레이. 배턴 대신 잔소리를 넘기는 계주. "강도현 씨, 전화요." 캐셔 누나가 휴대폰을 흔들며 소리쳤다. 번호를 보니 모르는 지역번호였다. 02였다. 서울 번호로 나한테 전화할 사람이 있었나? 스팸 전화면 그냥 끊어야지, 라고 생각하며 받았다. "여보세요." "강도현 씨 되십니까?" 낯선 남자 목소리, 딱딱한 사무적인 톤이었다. 보험 영업이라면 바로 끊을 참이었다. "네, 맞는데요." "강만수 씨의 유족 되시죠. 종로경찰서입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로 들린 건 아니고 그냥 그런 기분이었다. 할아버지 이름이었다. 어릴 때 몇 번 뵌 게 전부인, 얼굴도 가물가물한 그 할아버지. 명절에 세배하러 갔다가 세뱃돈 대신 옛날 동전 하나 받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그때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왜 세뱃돈으로 옛날 동전을 주는지. "저... 무슨 일이시죠?" "강만수 씨가 오늘 오전에 자택에서 사망하셨습니다. 자연사로 추정됩니다." [욥기 1:21,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적신으로 돌아가는 게 사람 인생이라지만, 나는 그 말보다 지금 당장 재고 확인을 마쳐야 한다는 압박이 더 크게 느껴졌다. 인간이 참 매정하다. 그래도 눈물이 핑 돌았던 건 사실이다. 전화를 끊고 나서 박 과장님한테 상황을 설명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해서요. 며칠 휴가를..." "어, 그래. 다녀와." 의외로 순순히 허락이 나왔다. 사람이 죽었다는데 갈굼을 칠 순 없었나 보다. 매정한 세상에도 이 정도 인정은 있구나 싶었다. * 장례식장은 조용했다. 조문객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뒤로 나와 할아버지 사이엔 딱히 끈이랄 게 없었으니까. 국화 몇 송이가 놓인 영정 사진 속 할아버지는 낯설었다. 사진 속에서도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마치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언가를 연구하고 있는 것 같은. 작은아버지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 소개를 했다. "자네가 도현이구먼. 많이 컸네이." 충청도 사투리가 진하게 묻어났다. 살집 좋은 체구에, 손에는 종이컵에 든 소주를 들고 있었다. 벌써 몇 잔 걸치신 듯했다. "할아버지가 유언장을 남겼다는디, 자네한테 다 넘긴다드라." "저한테요?" "그르니께 내 말이. 나도 황당혀. 종로 한옥이랑 뭐 이것저것 다 자네 몫이라는디." 종로 한옥이라니. 갑자기 부동산 이야기가 나오니 슬픔이 확 식었다. 인간이 참 매정하다니까. 서울 한옥이면 시세가 얼마인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할아버지 영정 앞에서 부동산 시세를 계산하다니. 그래도 계산은 멈추지 않았다. 이게 인간이다. "저기, 큰아버지... 그 집이 어느 정도 크기인지 아세요?" "몰러. 나도 가본 적이 몇 번 안 되니께. 근디 노인네가 거기서 뭘 그렇게 연구했다드라. 이상한 냄새도 나고." "연구요? 무슨 연구를요?" "그걸 알믄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겄어. 향 같은 것도 피우고, 밤에 이상한 소리도 난다고 동네 사람들이 그랬는디, 뭐 노인네 취미겠지 혔지." 연구? 이상한 냄새? 이상한 소리? 그 순간엔 그냥 노인네의 취미생활이라고만 생각했다. 큰 오해였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근디 도현이 자네, 그 집 들어갈 때 조심혀야 혀. 노인네가 죽기 전에 좀 이상한 소리를 했다드라." "이상한 소리요?" "뭐 '문 열면 안 된다'느니, '자물쇠는 도현이만 열 수 있다'느니. 노망 난 노인네 헛소리려니 했는디, 자네가 진짜 열게 됐으니 좀 께름칙하네." 작은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께름칙한 건 나였다. 노망 난 노인네 헛소리가 유언장에 그대로 적혀있다는 게 더 께름칙했다. * 변호사 사무실에서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사무실은 좁고 낡았다. 벽에 걸린 자격증 액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고, 책상 위 화분은 이미 죽은 지 오래인 듯했다. [강만수의 유언이 정식으로 개봉되었습니다] 라고 쓰여 있었으면 좀 멋있었을 텐데, 실제로는 A4 용지 몇 장과 볼펜 하나뿐이었다. 변호사는 오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는데, 안경을 자꾸 밀어 올리는 습관이 있었다. "강도현 씨, 여기 서명하시면 종로구 소재 한옥 및 그 부속 토지, 그리고 별도의 물품 일체가 상속됩니다." "별도의 물품이요?" "저희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유언장에 '집 안의 것들은 전부 도현이의 몫이며, 특히 잠긴 방은 그 아이가 열어야 한다'고만 적혀 있어서요." 잠긴 방. 왜 이런 대목에서 스릴러 영화 느낌이 나는 건지 모르겠다. "그 방... 열쇠는요?" "없습니다. 자물쇠 상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열쇠로 여는 방식이 아닌 것 같더군요." 무슨 방인데 열쇠가 없어. 번호 자물쇠도 아니고 뭐야. "혹시 그 방에 뭐가 있는지 아세요?" "저희도 궁금해서 여쭤봤는데, 강만수 씨가 생전에 '그건 도현이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만 하셨다더군요. 여기 서류 담당자가 직접 들은 얘기입니다." 변호사는 안경을 다시 밀어 올리며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서명란에 이름을 적으면서도 손이 살짝 떨렸다. 뭘 상속받는 건지도 모르고 도장을 찍는 기분이 묘했다. 마치 약관을 다 안 읽고 동의 버튼 누르는 것처럼. "자, 이제 강도현 씨는 정식으로 상속인이 되셨습니다. 열쇠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따로 없으니, 직접 가서 확인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열려는 있는 거죠?"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변호사의 대답이 왠지 더 불안했다. * 종로의 한옥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마당에 오래된 감나무가 서 있었고, 대문에는 낡은 문패가 걸려 있었다. [강만수] 이름 세 글자를 손으로 쓸어봤다. 손끝이 서늘했다. 문패는 오래돼서 색이 벗겨져 있었지만, 새겨진 글자만은 또렷했다. 마치 최근에 다시 새긴 것처럼.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당의 감나무가 바람에 흔들렸다. 아직 익지 않은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벌레 먹은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니 먼지 쌓인 세월이 코끝을 찔렀다. 방이 여러 개였는데, 대부분은 평범했다. 오래된 서랍장, 낡은 병풍, 곰팡이 핀 이불. 서랍장을 열어보니 옛날 흑백 사진들이 가득했다. 할아버지의 청년 시절 사진인 듯한데, 놀랍게도 사진 속 배경이 하나같이 낯익은 절이나 성당, 교회 같은 곳들이었다. 종교를 안 가리고 다니셨나 보다. 불경 책자와 성경, 그리고 이름 모를 언어로 쓰인 낡은 문서들이 서랍 한켠에 겹겹이 쌓여 있었다. 할아버지, 도대체 뭘 연구하신 겁니까. 그리고 가장 안쪽, 마당을 마주 보는 방 하나. 문에 손바닥만 한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이 자물쇠, 재질이 이상했다. 쇳덩이가 아니라 마치 검은 유리를 깎아 만든 것처럼 표면이 매끈했고, 안쪽에서 옅은 빛이 스며 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조명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라고 생각했다. 자물쇠 표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미세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한자도 아니고, 한글도 아니고,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기하학적인 무늬였다. 이걸 보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손을 뻗어 자물쇠를 만지는 순간, 손끝이 찌릿했다. 뭐지, 방금 정전기? 서울 한옥에서 정전기라니 그것도 나름 로맨틱하네, 라고 자조하며 자물쇠를 다시 잡았다. 그때였다. 자물쇠 안쪽에서 뭔가가 딸깍, 소리를 냈다. 분명히 아무 번호도 안 눌렀는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설마. 이 집, 진짜로 뭔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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