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다음 날 오후 여덟 시.
사무실에는 나와 강민석 둘만 남아 있었다.
야근 수당이라도 챙기려는 듯 다들 일찍 퇴근한 상태였고, 형광등 불빛만이 텅 빈 책상들 사이로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자판기 커피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나는 어제부터 서랍에 넣어둔 상자를 다시 꺼내며 마른침을 삼켰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12년 동안 이 일을 해오면서 이런 떨림은 처음이었다. 신입 시절, 첫 S랭크 소재를 감정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민석아." 나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불렀다. "잠깐 이리 좀 와봐라."
"네, 선배." 민석이 태블릿을 든 채 다가왔다. 12년 경력인 나와 달리 이 일을 시작한 지 이제 3년 정도밖에 안 된 후배였다. 성실하고, 눈치도 빠르고, 무엇보다 입이 무거운 놈이라 이런 일에는 딱이었다.
나는 상자를 열고 슬라임 핵을 꺼내 그의 앞에 내놓았다. "이거 한번 봐라."
민석은 별생각 없이 확대경을 대고 살펴보다가, 서서히 표정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눈썹이 미세하게 치켜 올라가고, 확대경을 든 손이 조금씩 각도를 바꾸며 핵의 표면을 다시, 또 다시 훑었다.
"이거... 절단면이 왜 이렇게 깔끔해요?"
"레벨 1짜리 헌터가 해체한 거야."
"뭐라고요?" 민석의 손에서 태블릿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둔탁한 소리가 사무실 정적을 갈랐다. "장난치시는 거죠?"
"장난 같으면 좋겠는데." 나는 서류를 그의 앞으로 밀었다. "이도현, 23세, 귀환자. 스킬 해체 레벨 1. 이게 접수 기록 전부야."
민석은 태블릿을 주워 들며 서류를 확인했다. 그의 안면 근육이 미세하게 경련하는 게 눈에 보였다. 서류를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했다가, 다시 붉어졌다가 했다.
"선배, 이거 측정값 다시 보여주세요."
나는 스캐너 화면을 켜서 어제 측정한 데이터를 다시 띄웠다. 오차 0.02밀리미터, 순도 99.99퍼센트. 숫자는 그대로였다. 어제도, 오늘도, 아마 내일 다시 봐도 똑같을 거다.
민석은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게... S랭크 최상급 기준을 넘는 거잖아요." 목소리가 미세하게 갈라졌다. "근데 이걸 레벨 1이 만들었다고요?"
"나도 처음엔 못 믿었어. 그래서 오늘 너한테 확인시켜주려고 부른 거야."
"혼자 확인하고 저한테 말씀만 하셔도 됐잖아요."
"혼자 보고 있으면 내가 미친 건지 아닌지 헷갈리더라."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너까지 같은 결론 내리면, 최소한 우리 둘 다 미친 건 아니라는 확신은 서잖냐."
민석은 다른 부위들도 하나씩 꺼내 확대경으로 살펴봤다. 점액질 샘플, 외피막, 신경 조직까지. 그의 손끝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확대경을 든 채로 몇 번이나 숨을 들이켰다가 참았다가 했다.
"이거 여섯 마리 전부 다 이런 상태예요?" 민석이 물었다.
"그래. 전부 동일한 품질이야."
"말도 안 돼..." 민석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등받이가 뒤로 넘어갈 것처럼 삐걱거렸다. "이거 진짜면, 이건 그냥 A랭크 헌터도 아니고, 최상급 정예 헌터가 최고급 장비 써서 나올 수 있는 수준인데요."
"그러니까 문제인 거야." 나는 팔짱을 낀 채 상자를 내려다봤다. "레벨 1짜리가, 특수 장비도 없이, 던전에서 이걸 만들어냈다는 거잖아."
사무실 안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형광등이 미세하게 웅웅거리는 소리만 공기를 채웠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민석은 확대경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무릎을 짚었다. "선배, 저 지금 등에 소름 돋았어요."
"나도 어제 그랬다."
"이거 혹시... 착오 아니에요? 해체자 기록이 잘못됐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 소재가 섞였거나."
"그럴까 봐 나도 접수 기록 세 번 확인했어." 나는 서류를 다시 짚었다. "접수 시각, 담당자 서명, 헌터 등록번호 전부 일치해. 이도현이라는 사람이 혼자 들어간 던전에서, 혼자 해체해서, 혼자 가지고 나온 소재야."
"동행자는요?"
"없어. 솔로 던전 진입이야. 파티 기록이 아예 없어."
민석의 얼굴에서 핏기가 조금 더 빠졌다. "레벨 1이 솔로로 던전에 들어가서 슬라임 여섯 마리를 이 정도 품질로 해체해서 나왔다는 거잖아요. 이거 완전 미친 소리인데요."
"그래, 미친 소리야." 나는 상자 안의 핵을 다시 들여다봤다. 형광등 불빛에 비친 표면이 마치 유리 조각처럼 매끄럽게 반짝였다. "근데 눈앞에 증거가 있잖아."
"선배, 이거 위에 보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민석이 조심스레 물었다.
"보고하기 전에 확실히 검증부터 해야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한 번의 사례만으로 보고하면 우리가 잘못 측정했다는 소리 듣기 딱 좋아. 이 사람이 다음에 또 소재를 맡겼을 때, 재현성이 있는지 확인해봐야 해."
"재현성이요?"
"이도현이 다시 던전 갔다가 소재 맡기면, 그때도 이 정도 품질이 나오는지 확인하는 거지. 만약 이번이 우연이 아니라면, 이건 그냥 상급 기관 보고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야."
민석은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슬라임 핵을 다시 바라봤다. "근데 왜 이런 헌터가 아직도 레벨 1로 남아 있는 거예요? 이 정도 실력이면 벌써 유명해졌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게 나도 이상한 부분이야." 나는 접수 기록을 다시 살폈다. "보통 헌터관리국에서는 스킬 레벨을 판단할 때 소재 품질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하거든. 근데 이 사람은 그냥 레벨 1로 등록되어 있어. 아마 담당자가 대충 확인만 하고 넘어간 것 같은데."
"그거 나중에 문제 되는 거 아니에요? 담당자 과실로."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나는 손을 저었다. "일단 사실 확인이 먼저지."
"그럼 이 사람은 자기 실력이 이 정도라는 걸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네요."
"그럴 가능성이 높지." 나는 상자를 다시 닫으며 말했다. "일단 우리는 이 사람이 다음에 소재를 맡길 때까지 기다려야 해. 그때 다시 은밀하게 재검수해서 재현성을 확인하는 거야."
"기다리는 동안 이 사람이 또 던전 안 들어가면요?"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지. 접수 기록에 뜨는 대로 확인하는 수밖에."
민석은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상자를 쳐다봤다. "만약 이게 진짜라면요?" 목소리에는 이제 흥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이건 완전히 새로운 사례잖아요. 이런 걸 우리끼리 다루기에 너무 큰 거 아니에요?"
나는 잠시 대답을 미루며 상자를 서랍에 다시 넣었다. 자물쇠를 걸어 잠그는 소리가 사무실 정적 속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맞아. 우리끼리 다루기엔 너무 큰 발견이야." 나는 민석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확실한 증거를 모은 다음에 움직이자. 섣부르게 보고했다가 오히려 우리가 이상한 사람으로 몰릴 수도 있어."
"이상한 사람으로요?"
"생각해봐. 레벨 1짜리 헌터가 S랭크 최상급 품질 소재를 만들어냈다는 보고를 올리면, 위에서 우리 검수 능력부터 의심할 거야. 측정 오류 아니냐, 장비 이상 아니냐, 하다못해 우리가 뭔가 착각한 거 아니냐 하고 캐물을 게 뻔해."
민석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불안한 기색이 남아 있었다. 그는 확대경을 케이스에 집어넣으며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민석아."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이거 당분간 우리 둘만 알고 있는 거다. 다른 사람한테 얘기하면 안 돼."
"왜요?"
"이도현이라는 사람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데, 소문이 이상하게 퍼지면 그 사람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 이 정도 실력이 알려지면, 좋은 쪽으로만 흘러갈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
민석은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도 입 다물고 있을게요. 근데 선배."
"뭐."
"저 오늘 집에 가서 잠 못 잘 것 같아요."
나는 피식 웃었다. "나도 어제 그랬다."
사무실을 나서며, 나는 서랍 안에 잠겨 있는 상자를 다시 떠올렸다. 어둠 속에서도 그 매끄러운 절단면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이 발견이 앞으로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나는 그때까지도 예감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이도현이라는 이름 하나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몰랐다. 이 이도현이라는 남자가, 앞으로 얼마나 더 우리를 이런 밤에 붙잡아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