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밑바닥, 완벽하게 해체하다

2화

정확히 오후 세 시 십칠 분, 나는 감정센터 지하 창고에서 밀린 접수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정재훈, 이 일을 시작한 지 벌써 12년째다. 매입감정센터에서 소재 감정을 담당하며 별의별 물건을 다 봐왔다고 자부했다. 몬스터 뼈에 새겨진 이상한 문자, 부위별로 색이 다른 변이종 가죽, 심지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던 슬라임 젤리까지. 그런 것들을 보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만큼 무뎌졌다고 생각했건만, 그날 오후만큼은 그 자부심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서류함 구석에 쌓여 있던 보류 상자들을 하나씩 꺼내며 재검수를 진행하는 게 원래 내 업무였다. 밀린 접수량이 많아서 우선순위가 낮은 소재들은 이렇게 며칠씩, 때로는 일주일 넘게 방치되기 마련인데, 대부분은 레벨 1이나 2짜리 하급 헌터들이 맡긴 것들이라 대충 확인만 하고 넘어가는 게 관례였다. 어차피 그 등급대 소재는 시세 편차가 크지 않아서, 정밀 감정을 해봐야 몇 백 원 차이도 안 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이도현..." 상자에 붙은 이름표를 읽으며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해체 레벨 1이네." 레벨 1이라는 표시를 보자마자 손이 자동으로 대충 넘기려는 습성이 발동했다. 12년 동안 몸에 밴 관성이었다. 상자를 열고, 내용물을 확인하고, 등급표에 도장을 찍고, 다음 상자로. 이 루틴을 하루에 백 번쯤 반복하다 보면 손이 뇌보다 먼저 움직였다. 그런데 상자를 열고 안에 든 소재를 꺼내는 순간, 나는 그대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슬라임 핵. 표면이 완벽한 구형을 그리고 있었다. 아니, 완벽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자연 상태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매끈함이었고, 절단면은 마치 레이저로 잘라낸 듯 오차 없이 깔끔했다. 형광등 불빛이 표면에 반사되어 미끄러지듯 흘러내리는 게, 유리 공예품을 보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감정용 확대경을 꺼내 다시 살펴봤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헌터가 슬라임을 잡아 해체하면 핵 주변에 점액질이 잔뜩 엉겨 붙기 마련이었다. 그걸 완전히 제거하려면 별도의 세정 작업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핵 자체에 미세한 스크래치나 흠집이 생기는 게 당연했다. 나는 지난 12년간 이런 흠집 없는 핵을 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나 헤아려봤다. 두 번. 딱 두 번이었다. 그것도 전부 A랭크 이상 헌터가 초정밀 해체용 마나 블레이드를 써서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그런데 내 앞에 놓인 이 핵은 세정 작업조차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이게... 레벨 1이라고?" 나는 서류를 다시 확인했다. 이름 이도현, 스킬 해체 레벨 1. 오기가 아니었다. 서류 번호도, 접수 도장도, 전부 정상이었다.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나는 상자 속 다른 부위들도 하나씩 꺼내 살폈다. 외피막, 점액질 샘플을 비롯해 이번에 맡긴 몬스터 여섯 마리분의 소재가 모두 이런 상태였다.각 부위의 절단면은 하나같이 오차 없는 완벽함을 유지하고 있었고, 부위별 분리 지점 역시 마치 사전에 정확한 좌표를 찍어놓고 잘라낸 것처럼 일관성이 있었다. 첫 번째 핵. 완벽. 두 번째 핵. 완벽. 세 번째 핵. 완벽. 여섯 번째까지 확인하는 내내 나는 같은 말을 속으로 되풀이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럴 리가 없는데. 이건 도구로 자른 게 아니었다. 도구로는 절대 이런 정밀도가 나올 수 없었다. 마나 블레이드조차 미세한 진동이 남기 마련이고, 그 진동은 절단면에 눈에 안 보이는 파문처럼 흔적을 남긴다. 그런데 이 핵들에는 그 흔적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감정 등급 기준표를 다시 펼쳐봤다. S랭크 품질 기준은 절단면 오차 0.1밀리미터 이내, 부위별 순도 99.9퍼센트 이상. 눈앞의 소재는 그 기준을 압도적으로 상회하고 있었다. 나는 감정용 스캐너를 가져와 정밀 측정을 시작했다. 스캐너가 표면을 훑는 동안 나는 숨조차 제대로 못 쉬었다. 오차 0.02밀리미터. 순도 99.99퍼센트. 숫자가 화면에 떠오르는 순간,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12년 경력 동안 이 정도 품질을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것도 대부분 A랭크 이상 헌터가 최고급 장비를 동원해 해체한 경우였는데. 레벨 1짜리 헌터가, 아무런 특수 장비도 없이, 던전 안에서 이런 결과물을 만들어낸다고? 말이 안 됐다. 나는 창고를 나와 접수 기록을 조회했다. 이도현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된 정보는 단순했다. 23세, 귀환자, 5년간 이세계 체류, 스킬 해체 레벨 1. 특이사항 없음. 특이사항 없음이라는 문구가 이토록 아이러니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등급표 어디에도 이 정도 정밀도를 만들어낼 이유가 적혀 있지 않았다. 스킬 등급이 레벨 1이면 절단 오차 보정치도 거의 없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결과물은 A랭크는 물론이고, 어쩌면 그 이상의 숙련자조차 흉내 내기 힘든 수준이었다. 혹시 내가 뭔가 잘못 본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 나는 다시 한 번 상자 속 슬라임 핵을 꺼내 육안으로 관찰했다. 여전히 완벽했다. 조명 아래서 은은하게 빛나는 표면은 마치 공장에서 정밀 가공을 거친 부품처럼 보였다. 손끝으로 살짝 굴려보니, 표면 어디에도 걸리는 부분이 없었다. 완벽한 구. 정말 우연일까? 한 개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넘길 수 있었다. 어쩌다 운 좋게 스킬 판정이 크리티컬로 떴다거나, 던전 환경 특성상 우연히 완벽한 절단이 나왔다거나. 하지만 여섯 마리 전부가 동일한 품질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 우연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재현성을 의미했다. 재현성이 있다는 건, 이게 실력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서류를 챙겨 든 채 사무실로 돌아갔다. 손끝이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걸 상급 기관에 보고해야 할지, 아니면 뭔가 착오가 있는 건지 먼저 확인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잘못 보고했다가 괜한 소란을 일으키면 그 책임은 전부 나한테 떨어질 게 뻔했고, 반대로 이걸 묵혀뒀다가 나중에 문제가 되면 그것도 내 책임이었다. 일단 이 사실을 누군가와 상의해야 했다.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운 발견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상자를 다시 닫으며, 나는 동료 강민석의 자리를 바라봤다. 오늘은 마침 야근을 하는 날이었다. 저 녀석이라면 이 상황을 함께 확인해볼 만한 신중함이 있었다. 성격이 무던하고 말수가 적은 편이라 헛소문 낼 위험도 적었고. "민석아." 나는 그의 자리로 다가가 말을 걸까 하다가, 이내 멈춰섰다.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나 혼자서도 이게 진짜인지 한 번 더 확인해야 했다. 남한테 얘기를 꺼냈다가 별거 아닌 걸로 결론 나면 그것대로 낙인이 찍힐 게 뻔했다. 12년차 감정사가 슬라임 핵 하나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는 소문이 돌면, 그야말로 웃음거리가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전에, 나는 이 소재의 진짜 정체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이건 절대 단순한 실수나 우연이 아니었다. 창밖으로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상자를 서랍 깊숙이 넣고 자물쇠를 걸었다. 자물쇠가 철컥 걸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 발견을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알려야 할지, 그날 밤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이도현. 스킬 해체 레벨 1. 23세, 귀환자. 이름 세 글자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되풀이됐다. 도대체 이세계에서 5년 동안 뭘 하다 온 걸까. 특이사항 없음이라는 문구 뒤에, 내가 아직 모르는 무언가가 숨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나는 그 무언가가, 감정센터 전체를 뒤흔들 만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까지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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