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손이 낯설었다.
가늘고 하얬다. 손톱 끝이 반들거렸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길고 곱상했다.
내 손이 아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 나는 손등에 털이 좀 나 있고 마디가 두꺼운, 서른 살 백수의 손을 가지고 있었다. 게임하면서 손목에 파스 붙이던 그 손, 라면 국물이 튄 자국이 아직 남아있던 그 손.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팔락거리는 이 손은 아니었다. 손목이 얇았다. 힘줄도 안 보였다. 손등에 핏줄조차 옅어서, 마치 누가 얇은 도자기로 손 모양을 하나 새로 구워낸 것 같았다.
나는 그 손을 눈앞에서 뒤집어 보고 다시 뒤집어 봤다. 몇 번을 봐도 결론은 똑같았다.
'이게 뭐야.'
소리 내어 말하려고 했는데, 목에서 나온 소리가 또 이상했다. 높았다. 내가 낼 수 없는 음역이었다. 성대가 통째로 바뀐 것처럼, 내가 아는 내 목소리의 껍데기만 남기고 속을 다 갈아치운 소리가 나왔다.
망했다.
그 한마디로는 부족했지만, 일단 그 생각부터 들었다. 부족한 걸 알면서도 다른 표현이 안 떠올랐다. 뇌가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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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어디였는지부터 짚어야 했다.
세 시간 전. 나는 별빛엔터테인먼트 3층 대기실 소파에 구겨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누나한테 끌려와서.
"도윤아, 오디션 한 번만 봐."
누나, 강하늬. 활동명 하늬비. 구독자 팔십만짜리 버튜버였고, 성격은 딱 그 채널명처럼 하늬바람같지 않았다. 태풍에 가까웠다.
"싫다니까."
"백수가 무슨 배짱이야, 가서 얼굴이라도 비치고 와."
"오디션이 뭔데 얼굴만 비쳐."
"몰라, 일단 가."
그 말 한마디에 논리 따위는 필요 없었다. 누나가 정하면 그게 곧 법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랬고 서른이 된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백수가 된 이후로는 그 법이 더 강력해졌다. 밥값을 대주는 사람 앞에서는 할 말이 없어진다.
결국 정장 재킷 하나 빌려 입고 여기까지 끌려온 게 두 시간 전. 재킷은 심지어 누나 남자친구 거였다. 소매가 짧아서 손목이 그대로 드러났다. 대기실에는 나 말고도 몇 명이 더 있었는데, 다들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학생들이었다. 다들 대본을 들고 중얼중얼 뭔가를 외우고 있었고, 나는 그 사이에서 혼자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넘기고 있었다. 서른 먹은 남자가 낄 자리가 아니었다.
옆자리 여자애가 슬쩍 나를 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그 눈빛에 담긴 의미를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저 아저씨는 뭐야'라는 눈빛이었다.
그때 그 애가 왔다.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교복도 아니고 사복도 아닌, 뭐라 설명하기 애매한 한복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색이 특이했다. 시중에서 파는 개량한복 색감이 아니라, 뭐라 할까, 오래된 그림에서나 볼 법한 채도였다. 대기실 문 앞에 가만히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처음엔 무시했다. 애가 어른을 빤히 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
그런데 그 시선이 너무 길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애를 신경도 안 쓰는데, 나만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저기요."
애가 말을 걸었다. 존댓말인데 어색했다. 마치 존댓말을 최근에 배운 사람이 문법만 맞춰서 말하는 느낌이었다.
"목이 마르실 텐데, 이거 드릴까요."
작은 유리병을 내밀었다. 안에 든 액체가 은은하게 빛났다. 색깔이 옅은 하늘색이었다가, 보는 각도에 따라 연둣빛으로도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자체로 경고등이었는데, 그때는 그냥 목이 말랐다. 대기실 안이 유독 덥고 건조했고, 나는 물병을 안 챙겨온 걸 후회하던 중이었다. 사람 미친다는 게 딱 이런 순간에 벌어지는 일이다. 목마름 하나에 판단력이 통째로 날아간다.
"이거 뭔데."
"몸에 좋은 거예요."
애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오히려 안 믿을 이유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문제였다. 어른이 그런 표정으로 말했으면 의심했을 텐데, 애 얼굴이라는 이유만으로 경계가 풀렸다. 그래서 마셨다.
맛은 별로 없었다. 밍밍했다. 약간 씁쓸한 뒷맛이 혀에 남았을 뿐이었다.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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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지금.
눈을 뜨자 천장이 낯설었다. 대기실 소파 위였다. 몸을 일으키자 어깨가 가벼웠다. 아니, 가벼운 게 아니라 아예 다른 몸이었다.
일단 앉은 자세부터 이상했다. 무게중심이 완전히 달랐다. 예전 같으면 그냥 몸을 일으키면 됐는데, 지금은 어디에 힘을 줘야 할지 감이 안 왔다.
가슴께가 이상했다. 뭔가 있었다. 있으면 안 되는 게.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 부위를 짚었다가, 확인하고는 바로 손을 뗐다.
"아."
소리가 또 그 높은 음이었다. 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코가 낮고 작았다. 턱도 갸름했다. 광대뼈도 예전보다 작고 부드럽게 느껴졌다. 머리카락이 어깨를 넘겨 가슴께까지 흘러내렸다. 손끝에 닿는 머리카락의 결이 부드러웠다.
원래 나는 머리를 짧게 치고 다녔다. 3주에 한 번씩 바리캉으로 밀듯이 자르는 스타일이었다. 이렇게 긴 머리를 가져본 적이 평생 없었다.
[상태 이상: 신체 구조 변화 감지]
어디서 들리는 목소리도 아니었는데 문장 하나가 머릿속에 그냥 박혔다. 게임에서 보던 그 창처럼. 배경도 없고 테두리도 없이, 그냥 사실 하나만 뚝 떨어졌다. 친절한 설명 같은 건 붙어있지 않았다. 그냥 통보였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게 뭔 개소리야."
혼자 중얼거리다가 목소리 톤에 또 놀랐다. 내가 냈는데 내 소리가 아니었다. 몇 번을 들어도 적응이 안 됐다. 마치 남이 내 성대를 빌려서 말하는 걸 옆에서 듣는 기분이었다.
일어나서 확인해야 했다. 뭐가 어떻게 됐는지, 정확히.
주변을 둘러봤다. 대기실 벽에 걸린 거울이 있었는데, 그쪽으로 가려고 발을 떼는 순간 다리가 휘청거렸다. 겨우 소파 팔걸이를 붙잡고 버텼다.
그때 방 한구석에서 뭔가 움직였다.
소파 뒤편, 커튼이 반쯤 쳐진 자리. 아까 그 여자아이가 벽에 등을 붙이고 서 있었다. 나를 보고 있었다. 표정이 하나도 안 움직이는 게 더 무서웠다. 겁먹은 것도 아니고, 즐기는 것도 아니고, 그냥 관찰하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너."
내가 손가락을 들어 그 애를 가리켰다. 손가락마저 가늘고 낯설어서, 가리키는 동작 하나에도 어색함이 묻어났다.
"너 이거 알고 있었지."
애가 시선을 피했다. 그 순간 확신했다.
시선을 피한다는 건 대개 두 가지 의미다. 부끄럽거나, 숨기는 게 있거나. 이 상황에서 부끄러울 이유는 없었다.
"너 뭐야."
애는 대답 대신 뒷걸음질을 쳤다. 커튼이 뒤에서 흔들렸다.
"잠깐."
내가 몸을 일으키려는데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몸이 낯설어서 균형 잡는 법 자체를 새로 배워야 할 것 같았다. 발목 관절의 각도부터 무릎을 굽히는 방식까지, 예전 몸이랑 미묘하게 다 달랐다. 몸무게도 훨씬 가벼운 것 같은데, 오히려 그게 균형을 잡기 더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소파 팔걸이를 붙잡고서야 겨우 섰다.
두 발로 서 있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서른 평생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거기 서."
애가 멈췄다. 그리고 아주 작게, 거의 안 들릴 정도로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은인님."
은인님.
그 단어가 귀에 걸렸다. 나는 이 애를 오늘 처음 봤다. 은인이 될 일이 없었다. 유리병 하나 받아 마신 게 전부였고, 그것도 지금 상황을 보면 은혜가 아니라 재앙에 가까웠다. 그런데 저 눈빛은, 저 태도는,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알던 사람 같았다. 마치 몇 년치 죄책감을 한꺼번에 짊어진 사람의 얼굴이었다.
"은인이라니, 나 너 오늘 처음 봤는데."
애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냥 나를 빤히 보다가, 다시 뒷걸음질을 쳤다.
"야, 어디 가."
"……가야 해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설명은 하고 가야지."
애가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그 손도 나처럼 작고 가늘었는데, 손끝에서 뭔가 옅은 빛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착각인지 아닌지 구별할 정신이 없었다.
"곧 알게 되실 거예요."
"그게 무슨 대답이야."
"죄송합니다."
애는 그 말만 남기고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나는 그대로 소파 팔걸이를 붙잡은 채 서 있었다. 다리는 여전히 후들거렸고, 목소리는 여전히 낯설었고, 손은 여전히 남의 것이었다.
망했다.
이번엔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었다.
뭔가 아주, 아주 크게 잘못된 거래에 나도 모르게 서명을 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서명의 대가가 지금 이 낯선 몸뚱이라면, 앞으로 얼마나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할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