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골목에서 눈뜨니 소녀였다

2화

사이렌은 아니었다. 순찰차가 사이렌을 켜지 않은 채 서서히 다가오는 소리였고, 나는 그 낮고 규칙적인 엔진음을 듣는 순간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아스팔트를 긁는 타이어 소리, 브레이크가 살짝 걸릴 때 나는 삐걱거림, 그리고 그 위로 얹히는 라디오 잡음 같은 것들이 어둠 속에서 유독 크게 들려왔는데, 나는 그 소리 하나하나에 심장이 쿵쿵 반응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 상황이 얼마나 수상한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새벽 시간에, 맨발로, 잠옷 같은 옷차림에, 자판기 밑동을 뒤지고 있는 금발 벽안의 소녀. 누가 봐도 실종 아동 신고나 아니면 미성년자 유기 사건쯤으로 오해받기 딱 좋은 그림이었다. 심지어 옆에는 뜯긴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자판기 패널까지 나동그라져 있었으니, 저게 무슨 상황인지 의심하지 않을 경찰이 있다면 그건 그냥 근무 태만이었다. "거기 학생." 순찰차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며 경찰관이 말을 걸었다. 나이는 삼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눈매가 날카로운 남자였는데, 목소리는 사무적이었지만 그 안에 이미 확신이 서려 있었다. 나는 그 확신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저건 백 프로 '이거 뭔가 사건이다' 하는 눈빛이었다.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나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뭐라고 답해야 하지? 사실은 제가 45세 파트타이머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 몸이 되어서 지갑도 신분증도 없이 골목에서 눈을 떴어요, 라고 말하면 그야말로 정신병원행 특급열차 티켓을 예약하는 꼴이 될 게 뻔했다. 아니, 정신병원이면 그나마 다행이지. 요즘 세상에 저런 소리를 하면 십중팔구 실험체나 유괴 피해자로 분류돼서 더 골치 아픈 곳으로 끌려갈지도 몰랐다. "길, 길을 잃어서요." 목소리가 떨리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는데, 나는 그게 오히려 상황을 더 그럴싸하게 만들어준다는 걸 깨닫고 애써 겁먹은 척 표정을 유지했다. 아니, 사실 겁먹은 건 진짜였다. 그냥 리액션이 조금 과장됐을 뿐. 눈에 살짝 눈물까지 고이게 하려고 애를 썼는데 그게 진짜 눈물인지 연기인지 나 자신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보호자는 어디 계세요?" 경찰관이 차 문을 열고 내리며 물었다. 구두 굽이 아스팔트에 닿는 소리가 또각, 하고 울렸고, 그 눈빛에는 이미 이 상황이 단순한 실종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이 서려 있었고, 나는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이 자리에 계속 있으면 안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저... 잠깐만요."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계산을 돌렸다. 순찰차까지 거리, 경찰관이 내리는 데 걸리는 시간, 내 몸이 얼마나 빠른지에 대한 확신 없는 추측까지. 이 모든 게 채 이 초도 안 되는 순간에 지나갔다. "학생, 일단 파출소로 같이 가서..."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이미 뒤돌아서 뛰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잘 뛰어졌다. 45세 아저씨 시절엔 백 미터도 못 뛰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을 텐데, 이 몸은 놀라울 정도로 가볍고 빨랐다. 발끝이 땅에 닿는 감각조차 다르게 느껴졌는데, 마치 몸 전체가 스프링처럼 튕겨나가는 것 같았다. 다리가 이렇게 가벼울 수가 있나, 뛰는 와중에도 그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예전 몸이었으면 벌써 무릎이 시큰거리고 옆구리가 결려서 주저앉았을 텐데, 지금은 숨도 별로 안 차고 오히려 다리에 힘이 남아도는 느낌이었다. "거기 서!" 뒤에서 경찰관이 소리쳤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골목을 이리저리 꺾어 돌며 최대한 거리를 벌리려 애썼는데,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손끝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골목 하나를 꺾어 들어가자 쓰레기봉투 더미가 쌓여 있었고, 나는 그걸 훌쩍 뛰어넘으면서 이런 순발력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스스로도 놀랐다. 발밑으로 고양이 한 마리가 놀라서 튀어 나갔는데, 그 고양이보다 내가 더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을 거다. 왜 도망치는지, 사실 나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본능적으로, 이 몸을 누군가에게 넘기면 안 된다는 감각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신원 조회를 당하는 순간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했다. 지문도 없고, 등록된 기록도 없고, 그렇다고 실종 신고가 들어와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이 몸뚱이가 조회에 걸리면 그 다음엔 뭐가 나올까. 나는 그 답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몇 개의 골목을 지나쳤을까. 숨이 조금씩 가빠오고 발바닥이 아스팔트의 자잘한 돌부리에 쓸려 따끔거리기 시작할 때쯤, 큰길로 튀어나온 순간, 나는 다시 정수리에서 그 짜릿한 감각을 느꼈다. 이번엔 더 확실했다. 손을 뻗지 않고도 느껴졌다. 뭔가 딱딱하고 단단한 것이 머리 위로 솟아오르는 느낌, 마치 뼈가 자라나는 듯한 이물감이 두피 아래에서부터 밀려 올라오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처음 느꼈을 땐 착각인가 싶었는데, 지금은 그게 착각이 아니라는 걸 온몸이 증언하고 있었다. 뜨끈한 감각이 정수리에서부터 관자놀이 쪽으로 퍼지듯 번지고 있었고, 나는 뛰는 와중에도 손을 들어 확인해보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행인 몇몇이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뭔가 이상한 걸 본 표정이었는데, 편의점 앞에 서 있던 남자는 담배를 든 손을 그대로 멈춘 채 나를 쳐다봤고, 택시를 기다리던 여자는 핸드폰을 들다 말고 눈을 깜빡였다. 나는 그 시선을 마주할 여유도 없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지금 내 머리 위에 뭐가 자라고 있는지 확인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일단은 살고 봐야 했다. 크르릉— 등 뒤에서 다시 경찰차 엔진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번엔 사이렌까지 켠 상태였고, 그 소리가 골목을 타고 울리는 걸 들으며 나는 씨발, 이게 무슨 꼴인지 싶었다. 45년을 조용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대가가 이거란 말인가. 도망자 신세로 새벽 거리를 맨발로 뛰어다니는 이 그림이, 어제까지만 해도 마트 창고에서 박스나 나르던 인생이 하루아침에 도달할 곳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사이렌 소리에 등이 떨렸다. 붉고 푸른 경광등 불빛이 골목 벽을 스치며 지나갔고, 그 빛이 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가 다시 줄이곤 했다. 나는 그 리듬에 맞춰 숨을 몰아쉬며 계속 달렸다. 횡단보도가 눈앞에 보였다. 신호는 빨간불이었는데, 나는 뒤를 살피며 그대로 도로로 뛰어들었다. 반대편으로만 넘어가면 골목이 다시 이어지고, 거기서 몸을 숨길 자신이 있었다. 머릿속엔 오로지 그 골목까지의 거리와, 그 골목 안에 숨을 만한 틈이 있을지에 대한 계산뿐이었다. 그런데. 횡단보도 중간쯤에서, 나는 왼쪽에서 들려오는 클랙슨 소리를 들었다. 뿌우우우우— 고개를 돌린 순간, 눈에 들어온 건 거대한 트럭의 앞부분이었다. 헤드라이트 두 개가 눈앞을 가득 채울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고, 브레이크를 밟은 것 같았지만 거리가 이미 너무 가까웠고, 나는 그 트럭이 나를 향해 그대로 미끄러져 오는 걸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몸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는 걸 느꼈다. 다리가 그렇게 잘 움직여주더니, 하필 지금 이 순간에는 땅에 뿌리라도 박힌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긁는 소리가 째지듯 울렸고, 그 소리 사이로 경찰관이 뭔가를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시야 전체가 헤드라이트의 흰 빛으로 뒤덮이고, 그 빛 속에서 트럭의 라디에이터 그릴이 점점 커지는 걸 보면서, 나는 이상하게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그 순간이 아주 느리게, 정지 화면처럼 늘어지는 것 같았다. 아, 이거 진짜 죽는구나. 그 생각이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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