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의식이 가물가물한 와중에, 이상하게도 눈앞에 펼쳐진 것은 어둡지도, 뜨겁지도 않은 새하얀 공간이었다. 발밑에는 대리석처럼 매끈한 바닥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그 표면 위로 은은한 푸른 문양이 잔물결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이거 죽은 건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태연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이상하게 통증도 없고 몸도 가벼웠다. 죽음 치고는 인테리어가 너무 고급스러운데, 하는 실없는 생각이 스쳤다. 전생에서도 이승에서도 이렇게 깔끔한 바닥은 본 적이 없었으니, 사후세계 담당자가 청소 하나는 확실히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눈앞에 대보았다. 손끝이 투명하게 비칠 만큼 흐릿했다. 이대로 사라지는 건가, 아니면 어딘가로 흘러가는 건가. 어느 쪽이든 크게 억울하지는 않았다. 이미 한 번 죽어본 몸이니, 두 번째 죽음쯤이야 좀 익숙해질 법도 하지 않은가. 그런 태연함 자체가 스스로도 우스웠지만, 지금 상황에서 발버둥을 친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어 그냥 힘을 뺐다.
그때 어딘가에서 따뜻한 손길이 이마를 짚는 감각이 느껴졌고, 동시에 온몸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눈앞의 새하얀 공간에 붉은 문양이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했다. 문양은 마치 실핏줄처럼 바닥을 타고 번져나갔고, 그 붉은빛이 지나간 자리마다 희미한 열기가 남았다. 나는 그 문양들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것이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두드리는 것 같은 감각이라는 것만은 어렴풋이 느껴졌다. '이게 뭐지, 뭔가 열리는 느낌인데.' 마치 오랫동안 잠겨 있던 문 뒤에서 누군가 손잡이를 돌리는 것 같은, 이질적이면서도 낯설지 않은 감각이었다. 두렵다기보다는 오히려 반가운 쪽이었는데, 그게 더 이상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시야 저편에서 도훈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깨어나시오, 소라 님."
나는 그 부름에 이끌리듯 눈을 떴고,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도훈의 얼굴이었다. 가까운 거리 때문인지 그의 숨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그의 손끝에서 희미한 초록빛이 여전히 맴돌고 있었고, 나는 그것이 회복 마법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손끝의 빛이 잔물결처럼 흔들릴 때마다 어깨의 통증이 조금씩 옅어지는 게 느껴졌다.
"저... 살았네요."
내가 겨우 웃으며 말하자, 그는 안도한 듯 짧게 숨을 내쉬면서도 표정을 감추려는 듯 시선을 피했다. 그 짧은 순간의 동요가 오히려 더 눈에 들어와서,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 사람도 사람이긴 하구나, 하는 실없는 감상이었다.
"어깨 상처는... 심하지 않았소이다. 다행이오."
말은 짧고 무뚝뚝했지만, 그 손끝은 내가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조심스럽게 따라붙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다 그제야 우리가 좁은 바위틈 사이, 무너진 통로에서 조금 떨어진 은신처 같은 곳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벽면에는 이끼가 덮여 있었고, 습기 찬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한쪽 구석에는 도훈이 급히 옮겨온 듯한 짐승 가죽과 물통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부러진 나뭇가지 몇 개가 불씨 없이 쌓여 있었다. 불조차 피우지 못한 걸 보니 상황이 얼마나 급했는지 짐작이 갔다.
"그 미노타우로스들은요?"
내가 묻자 도훈은 낮게 답했다.
"물러났소. 완전히 죽인 건 아니지만, 당분간은 안 올 것이오."
"당분간이라는 게 정확히 얼마나 되는 건데요? 하루? 이틀?"
"...정확히는 모르오. 놈들의 습성상, 무리를 이끄는 개체가 상처를 입으면 한동안 영역을 재정비하는 데 시간을 쓰지."
담담하게 이어지는 그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문장 속에도 정보는 착실히 담겨 있었고, 그게 이 남자의 화법이라는 걸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감정은 최소한으로, 사실은 정확하게. 그 말에 나는 안도하면서도, 조금 전 새하얀 공간에서 느꼈던 이상한 감각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뭔가 내 안에서 바뀐 것 같은데.' 나는 손끝을 오므려보며 미세한 떨림을 느꼈고, 그것이 두려움인지 흥분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몸속 어딘가에서 낯선 온기가 자리를 잡은 느낌이었는데, 마치 새로 산 신발을 신었을 때처럼 어색하면서도 은근히 신경 쓰이는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조금 전까지 애써 외면하고 있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현수 오빠랑 지운 언니는 왜 나를 버린 거지.' 단순한 실수였다면 무전이라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처음부터 나를 미노타우로스가 있는 통로 앞에 세워두고 사라졌다. 마치 계획된 것처럼. 던전에 들어서기 전, 현수 오빠가 유독 나에게만 후방을 맡기라고 했던 것도 이상했고, 지운 언니가 통로 앞에서 잠깐 머뭇거리며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도 다시 떠올리니 예사롭지 않았다. 그때는 단순히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그건 미안함에 가까운 표정이었던 것 같았다.
나는 그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면서도,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도훈에게 물었다.
"저 협회에 신고하면 안 돼요. 지금 협회로 돌아가면... 저도 어떻게 될지 몰라서요."
그 말에 도훈이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오래 이어졌고, 나는 괜히 눈을 피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이 남자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이상한 자존심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팀원들이... 저를 일부러 그 통로에 세워둔 것 같아요. 확실한 건 아니지만, 지금 협회에 가면 오히려 제가 더 위험해질 것 같아서요."
도훈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당분간은 나와 함께 있어도 상관없소. 여기는 협회 지도에도 없는 곳이니."
그 말에 나는 이상하게도 안심할 수 있는 무언가를 느꼈다. 낯선 남자와 던전 깊은 곳에 숨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 사람은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그가 여기까지 나를 옮기고, 손끝의 빛을 아끼지 않고 나눠준 걸 생각하면 그 확신이 완전히 근거 없는 것도 아니었다.
"고마워요. 근데... 왜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는 거예요?"
"동료를 버려두는 성미가 아니오."
간결한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결심했다. 팀이 왜 나를 버렸는지, 그 답을 찾을 때까지는 협회의 눈을 피해 이 던전 어딘가에서 숨어 지내야 한다고. '살아남고, 진실을 찾자.'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 순간, 발밑의 바위 바닥이 갑자기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어 손바닥을 바닥에 대보았지만, 흔들림은 점점 더 뚜렷해졌다. 벽면의 이끼 위로 작은 돌 조각들이 부스스 떨어져 내렸고, 도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가 급히 지팡이를 움켜쥐며 자세를 낮췄고, 나는 그 반응만으로도 이 진동이 단순한 지형 변화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설마 벌써?"
도훈이 낮게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가 흔들리는 것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