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배신당했더니 야생남뿐이라니

2화

정신이 든 것은 얼마나 시간이 지난 뒤였는지 알 수 없었다. 눅눅한 흙바닥에 등이 닿아 있었고, 그 축축한 냉기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온몸을 서서히 깨우는 느낌이었다. 어딘가에서 낮게 타는 불꽃 소리가 들렸는데, 타닥거리는 그 소리가 이상하게도 반가웠다.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코끝에 스치는 냄새는 놀랍게도 고기가 익는 냄새였다. '여긴 어디지. 설마 나 죽어서 어디 이상한 지옥의 야식집 같은 데 온 건 아니겠지.' 실없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는 걸 보면 아직 정신이 온전히 돌아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눈을 뜨려 했지만 눈꺼풀이 천근처럼 무거워서 겨우 반쯤 뜨는 게 다였는데, 그 흐린 시야 사이로 낯선 형체가 보였다. 헝클어진 장발에 온몸을 짐승 가죽으로 대충 두른, 근육질의 남자였다. 얼굴에는 오래된 흙먼지와 마른 핏자국이 얼룩져 있었고, 팔뚝에는 오래된 흉터가 몇 갈래로 그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눈빛만은 이상하게도 맑았다. 마치 야생에서 몇 년을 살아온 사람 같은데, 눈동자만은 아직 세상 물정을 다 잊지 않은 것처럼. 나는 그 순간 몸을 일으키려다 통증에 신음을 흘렸고, 어깨와 옆구리 쪽에서부터 뜨끈한 통증이 퍼져 나가며 정신이 완전히 돌아왔다. 그 소리에 그가 흠칫 놀라며 뒤로 한 발 물러섰는데, 그 반응이 어찌나 과장스럽게 커 보이던지 순간 내가 무슨 흉기라도 되는 줄 아는가 싶었다. "...깼구려." 그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쓰지 않아 삐걱거리는 듯 낮고 거칠었는데, 말투가 이상하게 옛스러워서 나는 순간 이 사람이 정말 인간인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사극 오디션이라도 보고 있는 건가. 아니면 방송 콘셉트 소품인가. 그런 부질없는 생각까지 스쳐 지나갔다. "당신... 누구세요?" 내가 겨우 묻자, 그는 시선을 피하며 손에 든 나뭇가지로 불을 뒤적였다. 마치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라는 듯, 시선을 불꽃에 고정한 채로 한참을 침묵했다. "도훈. 이도훈." 그게 전부였다. 성 다음에 이름을 다시 붙이는 것도 그렇고, 무뚝뚝하게 짧게 끊어내는 말투도 그렇고, 이 사람이 사람과 대화하는 법 자체를 거의 잊어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나는 몸을 살피다가 어깨와 갈비뼈에 감긴 붕대가 낯선 약초 냄새를 풍기는 걸 발견했고, 그것이 이 사람이 나를 치료해줬다는 뜻이라는 걸 깨달으며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붕대는 거칠었지만 단단하게 감겨 있었고, 매듭 하나하나가 꽤 정교했다. 못해도 응급처치는 프로급이었다. "저를... 살려주신 거예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짧게 답했다. "피가 많이 났었소. 몇 시진은 지났지." 시진이라니, 나는 그 단어 선택에서부터 이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사람들과 떨어져 살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시진이라는 단어를 실생활에서 쓰는 사람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사극 재방송에서나 들어봤을 법한 말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동굴 벽면에는 뼈로 만든 도구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고, 창끝처럼 다듬어진 것도 있었고 낚싯바늘처럼 휘어진 것도 있었다. 바닥에는 짐승 가죽이 침대처럼 깔려 있었으며, 그 위에 또 다른 얇은 가죽이 덧대어 있었는데 아마 내가 눕혀진 자리인 듯했다. 한쪽 구석에는 시든 약초 다발이 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말라붙은 나무껍질과 작은 돌절구까지 놓여 있었다. '이 사람 여기서 혼자 산 지 꽤 된 것 같은데.' 이 정도 살림살이를 갖추려면 최소 몇 년은 걸렸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여전히 내 시선을 피하며 손끝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마치 여자와 눈을 마주치는 법조차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 어색함이 이상하게도 밉지 않았다. "저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윤소라예요, E급 탐험자고 방송도 하고 있었는데—" 나는 말을 하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그런데 도훈 씨는 탐험자 등록증 있으세요? 협회 소속이신 거죠?" 그 질문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고, 손에 쥔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딱, 하는 그 소리가 동굴 안을 울릴 정도로 크게 느껴졌던 건 아마 그 직후에 이어진 침묵 때문이었을 것이다. "...없소." 그가 짧게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 입구 쪽으로 걸어갔는데, 그 등이 유난히 넓고 단단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움츠려 있었다. 도망칠 곳도 없는 동굴 안인데 뭘 그렇게 몸을 사리는지. 나는 순간 머릿속에서 협회 법규 조항이 떠올랐다. 등록되지 않은 남성 탐험자는 던전 출입 자체가 불법이며, 발각 시 즉시 구금 및 강제 노역형에 처한다는 그 조항. 실제로 그 조항이 적용되는 걸 본 적은 없었지만, 방송 초창기 교육 때 협회 규정집에서 몇 번이고 강조되던 문구였다. '이 사람, 불법체류자 같은 존재였구나.' 나는 그제야 그의 눈빛에 깔린 경계심의 이유를 이해했다. 몇 시진이 아니라 몇 년, 아니 어쩌면 훨씬 더 오래 이 던전 어딘가에 숨어 살아온 사람일지도 몰랐다. "괜찮아요, 저는 신고 안 해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나를 돌아보았는데, 그 눈에 스친 감정이 놀랍게도 안도감처럼 보였다. 큰 짐승이 경계를 풀고 슬며시 눕는 순간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고맙소." 그가 다시 불가로 돌아와 앉으며 나뭇가지 끝으로 고기를 뒤집었고, 나는 그 능숙한 손놀림을 보며 이 사람이 얼마나 오랜 시간 홀로 생존해왔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고기는 어디서 구한 건지, 던전 안에 사냥할 짐승이 있다는 것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불의 화력을 조절하는 손짓 하나만 봐도 이건 며칠 배운 솜씨가 아니었다. "여기서 얼마나 사셨어요?" 내가 묻자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낮게 답했다. "기억이... 잘 안 나오. 오래됐소." 그 대답에 나는 더 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지만, 속으로는 이 남자의 사연이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몇 년을 던전 안에서 혼자 버텼다는 건데, 그럼 처음 들어왔을 땐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텐데, 대체 어떤 사연으로 여기 갇힌 건지, 협회에 등록조차 못 한 채로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건지, 방송 대본으로 써도 시청자들이 눈물 콧물 다 쏟을 만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카메라만 있었어도 이거 하나로 조회수 대박이었을 텐데. 아니, 지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나는 스스로 고개를 저으며 딴생각을 몰아냈다. 고기가 노릇하게 익어가는 냄새가 점점 진해지면서, 나는 배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허기를 느꼈다. 죽다 살아난 마당에 식욕이 도는 게 우습기도 했지만, 인간의 몸이란 게 참 정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도훈은 익은 부분을 손가락으로 뜯어 내밀었는데, 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여자에게 무언가를 건네는 행위 자체가 오랜만인 듯, 손을 뻗는 동작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먹으시오. 기력을 차려야 하오." 나는 그 고기를 받아 조심스럽게 씹었는데, 짐승 특유의 비린내는 있었지만 놀랍도록 간이 잘 맞아 있었다. 소금 같은 걸 대체 어디서 구했을까, 아니면 특정 나무껍질을 태워서 맛을 낸 걸까.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일단 먹는 게 우선이었다. 그때 동굴 밖에서 땅을 울리는 발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낮고, 무겁고, 여러 개의 보폭이 겹치는 소리였다. 처음엔 멀리서 울리는 듯했지만 점점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고, 그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등골까지 저릿하게 만들었다. 도훈의 표정이 순식간에 사냥꾼처럼 차갑게 변했다. 방금까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던 그 남자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남았던 놈들이 냄새를 맡은 모양이오." 그가 짐승 가죽 사이에서 낡은 지팡이 하나를 꺼내 들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나는 그 지팡이 끝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맴도는 것을 보며 등골이 서늘해졌다. 저게 대체 뭘까. 나뭇가지처럼 보이는데 저런 빛을 내는 물건이 흔할 리 없었다.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고, 그 무게감만으로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체가 몰려오고 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나는 아직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상태였는데, 도훈은 이미 동굴 입구를 향해 몸을 낮추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넓은 등이 이번에는 움츠려 있지 않았다. 오히려 산맥처럼 단단하게 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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