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72년 무예, 곰으로 환생

5화

굴 입구에 어미가 나타났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뒤편에 다른 곰이 서 있었다. 훨씬 큰 몸집. 성체 수컷이었다. 뭐야, 저건. 강철심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새끼 곰의 몸이라 시야가 낮았다. 그래도 저 수컷의 크기는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어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어깨도, 앞발도, 전부 배는 두꺼웠다. 어미의 몸에는 작은 상처들이 나 있었다. 목덜미와 어깨 쪽에 붉은 자국들. 다투다 온 흔적이었다. 이미 한 번 붙었다는 얘기군. 강철심은 즉시 몸을 낮췄다. 산이와 다른 새끼들도 굴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비좁은 굴 안에서 새끼들끼리 몸이 부딪혔다. 털이 서로 스치는 감각. 따뜻하면서도 답답한 냄새. 성체 수컷은 굴 입구까지는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코를 킁킁거리며 안쪽을 살폈다.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게 여기서도 보였다. 먹이 경쟁자다. 인간이었을 때 습득한 야생 생태 지식이 떠올랐다. 반달가슴곰 수컷은 세력권을 넘나들며 다른 개체의 사냥터를 노리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새끼가 있는 어미의 사냥터는 좋은 표적이었다. 새끼를 지키려면 어미가 함부로 맞서지 못한다는 걸 아는 거지. 계산적인 놈이네. 짐승도 저런 계산을 할 수 있나. 아니, 본능이겠지. 본능이든 계산이든 결과는 같았다. 어미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굴 입구를 몸으로 막았다. 경고였다. 으르르릉. 낮고 무거운 소리가 굴 안까지 울렸다. 하지만 수컷은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굴 안쪽을 향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 시선이 새끼들 중 한 곰에게 멈췄다. 강철심이었다. 뭘 봐. 수컷의 눈에 뭔가 이상한 감정이 스쳤다. 호기심 같은, 혹은 계산 같은 눈빛이었다. 짐승 눈에서도 저런 게 읽히나. 강철심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인간이었을 때 배운 상식이었다. 맹수와 눈을 마주치면 위협으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지금 저놈이 나를 먹잇감으로 보는 건가. 아니면 그냥 방해물로 보는 건가. 어느 쪽이든 좋은 시선은 아니었다. 순간 어미가 몸을 날렸다. 으르렁거리며 수컷을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크르릉. 둔탁한 소리가 굴 안까지 울렸다. 수컷이 뒤로 물러났다. 강철심은 그 순간 숨을 삼켰다. 어미의 앞발이 수컷의 얼굴을 정확히 스쳤다. 붉은 줄이 하나 더 늘었다. 먹혔다. 하지만 완전히 물러나진 않았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다시 자세를 낮췄다. 다시 덤빌 준비. 강철심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머리를 굴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새끼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몸집 차이가 너무 크다.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뭔가 방법이 있을 텐데. 새끼 곰의 몸으로 뭘 할 수 있을까. 발톱도 작고, 이빨도 아직 덜 자랐고. 힘도 성체의 십분의 일도 안 될 텐데. 그럼 몸 말고 다른 걸 써야지. 어미와 수컷이 다시 맞붙었다. 이번엔 더 격렬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 발톱이 부딪히는 소리. 쿠웅, 쿠웅. 몸과 몸이 부딪히는 소리가 땅까지 흔들었다. 굴 안쪽의 새끼들이 겁에 질려 서로 몸을 붙였다. 산이가 강철심의 몸에 바짝 붙어왔다. 떨고 있었다. 작은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게 그대로 전해졌다. 괜찮아, 아마. 강철심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확신이 없었다. 어미의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맞붙을 때마다 어미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졌다. 이대로면. 강철심은 굴 입구 쪽으로 조금씩 움직였다. 뭘 하려고. 스스로도 명확한 계획은 없었다. 다만 가만히 앉아서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인간이었을 때도 그랬다. 부당한 걸 보면 참지 못했다. 힘의 차이가 나도, 승산이 없어도. 그게 몇 번이나 손해로 돌아왔는지 몰랐다. 그래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굴 입구 근처, 돌무더기 사이에 뭔가 눈에 들어왔다. 작은 바위 하나가 불안정하게 놓여 있었다. 크기는 강철심의 몸통만 했다. 하지만 놓인 위치가 미묘했다. 저거, 밀면.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각도, 무게, 낙하 지점. 저 각도라면 굴 입구 바로 앞으로 떨어진다. 소리도 크게 날 테고, 흙먼지도 튈 테고. 수컷을 놀라게 할 수 있을지도. 지금 몸으로 저 바위를 밀 수 있을까.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시도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강철심은 조심스럽게 바위 쪽으로 다가갔다. 발밑이 미끄러웠다. 이슬에 젖은 흙바닥. 밖에서는 여전히 어미와 수컷의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미의 울음소리가 점점 지쳐가는 게 느껴졌다. 서둘러야 했다. 앞발을 바위에 대고 힘을 주었다. 으윽. 새끼 곰의 근육이 이렇게 약할 줄 몰랐다. 바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이 악물고 다시 힘을 줬다. 발톱이 흙바닥을 파고들었다. 그 순간, 굴 밖에서 어미의 비명 같은 울음소리가 터졌다. 크아앙. 뭔가 크게 잘못된 소리였다. 강철심의 몸이 순간 굳었다. 어미가 밀렸다. 돌무더기 사이로 보이는 광경, 어미가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수컷의 앞발이 어미의 몸을 짓누르려 하고 있었다. 어미의 몸통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버티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대로면 정말 큰일 나겠는데. 강철심은 바위를 밀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세게 힘을 주었다. 지금 아니면 늦어. 바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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