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역전 세계 경마왕

3화

오티 장소는 학교 근처 술집이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시선이 확 쏠리는 걸 느꼈다. 이십여 명의 신입생과 선배들이 모여있는 자리였는데, 남자는 나를 포함해 세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여자였다. 그것부터가 이 세계의 축소판이었다. 남자가 희귀종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이렇게 숫자로 확인하니 체감이 또 달랐는데, 스무 명 중 세 명이라는 건 대충 육 대 일이 넘는 비율이었고, 그 세 명 중 하나가 나라는 사실이 어쩐지 실감이 안 났다. 예전 같으면 술자리에서 이 정도 성비면 오히려 내가 구석에서 안주만 축내는 쪽이었을 텐데, 지금은 입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스무 개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꺾이는 걸 느꼈다. ...이게 되네,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나는 최대한 표정을 정리하고 구석 자리에 조용히 앉으려 했지만, 옆방 동기였던 그 애가 재빨리 손을 뻗어 나를 끌어다 앉히며 "여기 앉아, 도현아" 하고 웃었다. 거절할 틈도 없이 엉덩이가 의자에 붙는 속도가 참으로 신속했는데, 이런 걸 보면 이 세계에서 남자 신입생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탐나는 자리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술이 몇 잔 돌기 시작하자 분위기는 급격히 풀어졌고, 선배들이 신입생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며 웃음을 유도했는데, 그 질문들이 하나같이 남자 신입생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남자친구 있어?", "이상형이 뭐야?", "연애 경험 몇 번이나 돼?", "지금 만나는 사람 없으면 우리 학번들 중에 누가 제일 마음에 드는데?" 같은 질문들이 순서를 바꿔가며 나를 향해 쏟아졌고, 나는 그걸 받아넘기며 최대한 무난하게 대답했다. 이상형은 딱히 없고, 연애 경험은 뭐 있긴 한데 자랑할 정도는 아니고, 하는 식으로 알맹이 없는 대답을 웃음으로 포장해서 돌려주는 게 나름의 노하우였는데, 오십대의 사회생활 경력이 이런 순간에는 꽤 유용했다. 회식 자리에서 부장님의 뻔한 질문을 웃으면서 흘려보내던 그 근육이, 몸이 이십대가 됐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젊은 얼굴에 그 능글맞은 화법이 얹히니 상대방들은 그걸 순수한 매력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는데, 정작 속내를 말하자면 이건 그냥 삼십 년 가까이 굴려온 사회생활 스킬의 재활용일 뿐이었다. 그런데 자리 끝쪽에서 유난히 시끄럽게 웃던 여자 한 명이 계속 내 쪽을 흘겨보고 있었다. 처음엔 그냥 눈이 마주친 건가 싶어서 무시했는데, 두 번, 세 번 반복되니 이건 확실히 의도가 있는 시선이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게 3학년 선배 정하은이었는데, 이미 술이 꽤 오른 상태였고 목소리도 크고 행동도 거침없었다. 그녀는 소주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쟤 좀 봐, 신입생인데 왜 저렇게 여유로워" 하고 옆 사람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옆 사람이 뭐라고 대꾸했는지는 잘 안 들렸지만 정하은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계속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봤다. 나는 그걸 못 들은 척하며 술잔을 비웠는데, 속으로는 '저 선배, 뭔가 나한테 불만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처음 보는 사람한테서 그런 눈초리를 받는 게 딱히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먼저 다가가서 뭐라고 말을 걸 상황도 아니었으니, 그냥 조용히 내 잔만 채우고 비우는 게 최선이었다. 자리가 파할 무렵, 나는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복도에서 정하은과 마주쳤다. 좁은 복도에 형광등이 하나 깜빡거리고 있었는데, 그녀는 벽에 손을 짚고 서있었고,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고 시선이 흐트러져 있었다. 딱 봐도 술이 과하게 들어간 상태였는데, 나는 그냥 지나가려고 옆으로 살짝 몸을 틀었다. "어, 신입생" 하고 그녀가 나를 부르며 다가왔는데, 걸음이 이미 위태로웠다. 발이 엉키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고, 이대로 두면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질 것 같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했는데, 순전히 사고를 막으려는 의도였을 뿐인데, 그 순간 그녀가 내 어깨를 잡고 몸을 기울이며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술 냄새와 함께 뭔가 달큰한 향이 훅 끼쳤는데, 나는 그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면서도 몸이 먼저 굳어버려서 뒤로 뺄 타이밍을 놓쳤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하고 정하은이 웅얼거리듯 물었고, 나는 "강도현입니다" 하고 대답하려 했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걸 느꼈다. '...뭐야 지금' 하는 생각과 동시에 몸이 완전히 굳었는데, 손끝까지 뻣뻣해지는 게 마치 전기가 통한 것 같았다. 정하은은 태연하게 입을 떼고는 "음, 나쁘지 않네" 하고 씨익 웃었는데, 그 여유로운 표정을 보고 있자니 이게 그녀에게는 그냥 술김에 한 번쯤 저지르는 일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싶었다. 오십 평생 여자에게 이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걸 넘어서 거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전생에서는 소개팅 자리에서도 먼저 말 붙이는 게 힘들어서 어색하게 물만 마시다 헤어진 경험이 몇 번인데, 여기서는 처음 본 선배가 복도에서 다짜고짜 입을 맞추고 웃어넘기는 게 일상인 모양이었다. 세계가 바뀌면 연애의 문법도 통째로 바뀌는구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면서도, 정작 그 순간엔 아무 생각도 정리가 안 되고 그냥 얼어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복도 끝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정하은 선배,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돌아보니 안경을 쓴 단정한 인상의 여자가 서있었는데,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게 학과 간사장 김서연이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정하은의 팔을 붙잡으며 "신입생한테 이러시면 안 되죠, 술 취했다고 다 넘어가는 거 아니에요" 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었고, 팔을 붙잡는 손에도 힘이 실려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제정신인 사람이 등장한 느낌이었다. 정하은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팔을 빼려 했지만, 김서연은 물러서지 않고 그녀를 끌고 갔는데, 그 와중에 정하은이 나를 향해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리며 웃어 보였다. 저 여유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나는 그저 헛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강도현 씨,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 하고 김서연이 뒤늦게 나를 향해 물었는데, 그녀의 목소리에는 신입생을 걱정하는 어른스러운 배려가 묻어있었다. 안경 너머로 나를 살피는 눈빛이 진심으로 걱정스러워 보였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상대방을 챙기는 걸 보면 확실히 간사장이라는 자리가 아무나 맡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나는 "아, 예, 괜찮습니다" 하고 대답했는데, 사실 괜찮지 않았다. 정확히는 이 세계의 규칙을 하나 더 확인한 셈이었으니까. 이 세계에서는 여자가 남자에게 저렇게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게 일상적인 풍경이었고, 남자는 오히려 그걸 조심스럽게 받아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니까 아까 그 상황도 정하은에게는 그다지 큰 사건이 아니었을 거고, 김서연이 저렇게까지 나서서 말리는 것도 어쩌면 이 세계에서는 흔하게 벌어지는 일을 수습하는 익숙한 절차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저 선배가 원래 좀 그래요, 술만 마시면 저러시는데... 다음에도 이런 일 있으면 저한테 바로 말해요, 알겠죠" 하고 김서연이 덧붙였는데, 그 말투에 이미 익숙함이 묻어있는 걸 보니, 정하은의 이런 행동이 오늘 처음 있는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 감사합니다" 하고 짧게 답했는데, 속으로는 이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저런 술자리 문화에 대한 나름의 방어 태세를 갖춰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김서연이 정하은을 데리고 사라진 뒤, 나는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오래 들여다봤다. 형광등 불빛 아래 얼굴이 조금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는데, 이게 술기운인지 아까 그 사건 때문인지 구분이 잘 안 됐다. 입술 끝에 아직 술 냄새가 남아있었는데, 그 감각이 이상하게 선명해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물을 틀어 손을 씻으면서도 자꾸 그 순간이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됐는데, '이게, 첫 키스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원래 내 몸의 나이를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었지만, 이 몸의 기준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었다. 강도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이십 년 남짓한 시간 동안 이런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면, 이게 정말로 첫 키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으니까. ...참, 나이 오십 먹고 이십대 몸으로 첫 키스를 논하는 것도 어지간히 코미디였다. 그러다가 나는 그 생각을 황급히 지워버리고, 대신 물기가 남은 손으로 얼굴을 한 번 문지르고는, 술집 밖으로 나와 밤바람을 맞았다. 밤공기가 제법 쌀쌀했는데, 그 서늘함이 오히려 정신을 차리는 데 도움이 됐다. 뒤에서 몇몇 동기들이 나를 부르며 따라 나왔지만, 나는 대충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오늘 하루만으로도 이 세계에 대해 확인해야 할 것들을 몇 개나 더 알게 된 느낌이었는데, 남자가 드물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게 술자리에서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는지,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이 세계 나름의 최소한의 질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까지 눈으로 확인한 셈이었다. 요컨대 이 세계는 겉보기엔 낯설어도 나름의 규칙이 있고, 그 규칙 안에서 정하은 같은 사람도 있고 김서연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나는 그 규칙 안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조금 더 신중하게 계산해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아까 팔았던 만화책과 게임팩으로 만든 사만 오천 원을 손에 쥐고 있었다. 지폐 몇 장과 동전 몇 개가 손바닥 안에서 부딪히는 감촉이 묘하게 현실적으로 느껴졌는데, 이걸로는 여전히 부족했지만, 내일 당장 경마장에 가볼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내일이, 내가 기억하는 그 경주가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겪은 정하은과의 그 황당한 사건도, 김서연의 단호한 개입도, 다 흥미로운 경험이긴 했지만,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건 그 경주였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 돈이 필요했고, 돈을 만들어낼 방법 중에 내가 유일하게 확실히 알고 있는 게 바로 그 경주의 결과였으니까. 사만 오천 원, 이 돈이 내일이면 몇 배로 불어날지, 아니면 그냥 허무하게 사라질지, 그건 내일 가봐야 알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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