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문을 열자 눈앞에 서있던 사람은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여자애였는데, 짧은 커트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며 "뭐야, 얼굴이 왜 그래, 밤새 게임했어?" 하고 물었다. 나는 순간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입만 벙긋거렸는데, 목구멍에서 나온 건 언어가 아니라 그냥 '어...' 하는 바람 소리 비슷한 것뿐이었다. 그 애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튼 오티 늦으면 안 돼, 선배들 성격 만만치 않아" 하고는 계단을 먼저 내려갔는데, 슬리퍼를 신은 발소리가 탁탁탁 경쾌하게 울리는 걸 들으며 나는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옆방 동기인가, 아니면 여자친구인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애초에 내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파악 못 한 상태에서 인간관계 파악까지 하려는 건 욕심이었다.
일단 방으로 다시 들어와서 문을 닫고, 나는 책상 서랍을 뒤졌다. 원래 이 몸의 주인이었을 강도현이라는 학생의 흔적이 있을 텐데, 그걸 통해 세계관과 상황을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으니까. 서랍 안에는 학생증, 통장, 그리고 낡은 지갑이 있었는데, 학생증에는 낯선 얼굴 사진 대신 방금 화장실 거울에서 봤던 그 얼굴이 박혀있었다. 이름 강도현, 학과는 경영학과, 생년월일을 계산해보니 스물한 살이었다. '나이는 젊어서 좋네' 하는 생각을 하며 통장을 펼쳐본 순간,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잔고 삼만 이천 원.
'이 몸도 나만큼 가난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익숙한 감정 하나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건, 절박함이었다. 오십 평생 나를 따라다니던 그 감정이 몸이 바뀌어도 그대로 붙어있다니, 이것도 어떤 의미로는 운명적인 일관성이 아닐까 싶었다. 통장 뒤쪽을 넘겨보니 입출금 내역이 몇 줄 있었는데, 대부분 편의점 알바비로 들어온 돈이 그대로 나가는 구조였다. 저축이라고 할 만한 흐름이 전혀 없었다. '이 자식도 나처럼 그날그날 사는 인생이었나 보네' 싶어서 묘한 동질감이 들었다.
지갑을 열어보니 현금 몇 천 원과 함께, 안쪽 주머니에서 접힌 신문 쪼가리 하나가 나왔는데, 펼쳐보니 경마 신문이었다. 과천경마장, 3월 첫째 주 경주 예상지. 나는 그 종이를 손에 쥐고 잠시 굳어버렸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는데, 그건 놀라움보다는 어떤 확신 비슷한 감각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오십대까지 살면서 유일하게 자부할 수 있는 특기가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경마였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부터 경마에 미쳐 살았고, 한창 때는 매주 과천을 들락거리며 마권을 사고 판돈을 날리길 반복했었는데, 그 와중에도 특히 이 시기, 95년 전후의 경주 결과는 워낙 여러 번 복기하고 곱씹었던 기억이라 대부분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인생 최악의 시기와 겹쳐서 그런지, 뇌리에 못 박히듯 남아있던 데이터였다. '...이게 되네?' 하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느껴졌는데, 이건 절박함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흥분이었다.
요컨대, 나는 미래 정보를 가진 채로 과거로 돌아온 셈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 세계'가 내가 알던 1995년과 같은 흐름으로 흘러간다는 전제하에서만 유효한 이야기였지만, 성별 역전이라는 결정적 차이를 빼면 다른 부분들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해 보였다. 아까 텔레비전 뉴스에서 나온 사건들, 방금 확인한 신문 날짜,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던 거리 풍경까지, 세부적인 사회 구조만 바뀐 것 같았고 나머지 흐름은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경마 결과도 같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는 계산이 섰다. 간단한 계산식이었다. 세계의 뼈대가 같다면, 그 뼈대 위에서 벌어지는 우연들—말의 컨디션, 기수의 실력, 트랙의 상태 같은—도 똑같이 재현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다만 문제는 자금이었다. 통장에 삼만 이천 원, 지갑에 현금 몇 천 원, 이 정도로는 배팅이랄 것도 없었다. 마권 최소 단위가 얼마인지는 정확히 기억 안 나지만, 이 돈으로 걸어봤자 나오는 수익도 코딱지만 할 게 뻔했다. '일단 종잣돈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당장 뭘 팔 것도 없고 알바를 구하려 해도 시간이 걸릴 텐데, 나는 잠시 골머리를 앓다가 문득 방구석에 쌓인 만화책과 게임팩을 발견했다.
책장 한쪽에 가득 꽂힌 만화책들, 그리고 그 옆에 박스째로 쌓인 게임팩들. 강도현이라는 학생이 모아둔 취미 물품인 듯했는데, 표지를 슬쩍 훑어보니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이런 걸 팔면 몇 만 원은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헌책방과 중고 상점을 떠올리며 나는 그것들을 봉투에 쓸어 담기 시작했는데, 손이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머릿속에서는 계속 경주 데이터가 재생되고 있었다. '3월 둘째 주에 그 말이... 아니, 셋째 주였나' 하며 기억을 더듬는 게, 마치 시험 전날 벼락치기하는 기분이었다. 다만 이번엔 시험이 아니라 인생을 건 판이라는 게 다를 뿐이었다.
봉투 두 개를 가득 채우고 나서, 나는 방을 한 바퀴 둘러보며 더 팔 만한 게 있는지 훑었다. 오래된 라디오, 낡은 워크맨, 뭔가 애착이 있었을 법한 인형 하나까지—이건 아마 여자친구가 준 선물이었으려나, 아니면 그냥 취향이었으려나 잠깐 궁리했지만 답이 나올 리 없어서 그냥 그대로 두기로 했다. 감정적으로 의미가 있어 보이는 물건까지 팔아치우기엔 아직 내가 이 몸에 완전히 적응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 와중에도 계속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아까 텔레비전에서 봤던 그 이상한 광고들, 그리고 옆방 동기라던 여자애의 자연스러운 태도. 이 세계에서는 남자가 뭔가 다른 취급을 받는 게 분명했는데, 그게 정확히 어떤 방식인지는 아직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성별이 역전됐다는 건 확실했지만, 그게 사회 전체에 어떤 식으로 반영됐는지—단순히 외견상의 역할 교체인지, 아니면 법적, 문화적으로도 완전히 뒤바뀐 세계인지는 겪어봐야 알 일이었다. '일단 학교 가서 직접 보는 게 낫겠다' 하고 나는 짐을 챙기며 결론을 내렸다.
밖으로 나서자 거리는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90년대 특유의 촌스러운 간판 디자인, 삐삐를 허리춤에 찬 사람들, 그리고 골목마다 붙어있는 포스터들. 그런데 그 포스터들이 하나같이 남자 모델을 앞세운 상품 광고였고, 화장품, 속옷, 심지어 정력제 같은 것까지 남자가 모델로 서있었다. 정장을 빼입은 남자가 손목시계를 차고 카메라를 향해 웃는 포스터, 상반신을 드러낸 남자가 무슨 영양제 광고에 나온 포스터, 심지어 골목 끝 약국 앞에는 남성용 자양강장제 포스터까지 붙어있었는데, 문구가 "그 남자, 오늘도 든든하게"였다. 나는 그걸 지나치며 '...개판인데?' 하는 생각을 삼켰는데, 그때 골목 어귀에서 여자 셋이 나를 흘겨보며 소곤거리는 걸 발견했다.
"저 남학생 좀 봐, 얼굴 괜찮다" 하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는데, 그 여자들은 이미 눈을 피하며 자기들끼리 웃고 있었다. 한 명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고, 다른 한 명은 아예 등을 돌리고 어깨를 들썩였다. 이건 뭔가, 내가 알던 세계와 완전히 반대되는 시선이었다. 오십대까지 살면서 여자에게 저런 시선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었던 나로서는, 이 상황이 낯설고 어색하면서도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마치 발가벗겨진 채로 길을 걷는 기분이랄까, 아니면 정반대로 갑자기 아이돌이 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 뭐라 정의하기 애매한 감각이었다.
'이 몸이 원래 인기가 있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봉투 두 개를 양손에 든 채로 계속 흘겨보는 시선을 받으며 걷자니 걸음이 자꾸 뻣뻣해졌는데, 예전 몸이었다면 신경도 안 쓸 일이었을 텐데 지금은 이상하게 뒤통수가 뜨거웠다. 헌책방에 들러 만화책과 게임팩을 처분하는 것도, 학과 오티에 참석하는 것도, 전부 오늘 안에 해내야 할 일이었고, 거기서 뭘 마주치게 될지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 이 낯선 세계에서 내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밑천은 머릿속에 저장된 경마 데이터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만 믿고 오늘 하루를 버텨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