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귀환했더니 좀비 아포칼립스

5화

이하늘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아저씨, 저 사람 이상해요. 빨리 가요." 그녀가 낮게 속삭였다. 정장 차림의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계속 망원경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마치 관찰 대상을 확인하는 것처럼, 렌즈 각도조차 바꾸지 않고. '……저건 생존자가 아니다.' 생존자라면 저렇게 멀쩡한 정장을 입고 있을 리가 없었다. 넥타이 매듭까지 완벽했다. 좀비 아포칼립스 와중에 넥타이를 저렇게 딱 맞춰 맨 사람이라니, 뭔가 소속이 있는 게 분명했다. '회사원 코스프레하는 좀비인가.' 아니, 그건 더 무섭다.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이하늘의 손을 따라 몸을 돌렸다.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걸었다. 걸음이 점점 빨라지다가, 나도 모르게 거의 뛰는 속도가 됐다. 골목을 몇 번 꺾자 남자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담벼락에 등을 붙이고 숨을 골랐다. "휴, 뭐였을까요 그 사람." 이하늘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몰라. 나도 처음 봐."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설마 벌써 누가 나를 조사하러 온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영상 하나 퍼졌다고 해서 정부나 어디 조직이 바로 사람을 붙일 정도는 아닐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세상이 그렇게 빨리 돌아가진 않아. 관공서 서류 처리도 삼 일 걸리는데.' 그런 논리로 나 자신을 설득했지만, 등 뒤가 서늘한 느낌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 이하늘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은 고급 오피스텔이었다. 건물 외관부터 남달랐다. 이런 난리통에도 유리 외벽이 반짝반짝했다. 로비는 이미 좀비 몇 마리가 배회하고 있었는데, 이하늘이 익숙하게 옆 계단으로 돌아 들어갔다. 동선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마치 학원 다니듯 반복해본 길처럼 보였다. "여기 저희 아빠 명의로 된 집이에요. 별장처럼 쓰던 곳." 그녀가 설명했다. "별장을... 시내 한복판에 두시는구나." 나는 중얼거렸다. '세상 사는 방식이 다르구나.' 나 같으면 별장은 산이나 바다에 뒀을 텐데. "부모님은?"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해외 출장 가셨어요. 사태 터지고는 연락 끊겼고요." 이하늘이 담담하게 말했다. 말투는 무심했지만, 표정에는 미세한 그늘이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그녀의 발걸음이 살짝 무거워졌다. '……이 애도 힘든 상황이겠지.' 나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괜히 아픈 데를 찌를 필요는 없었다. 오피스텔 안은 예상보다 넓고 깨끗했다. 거실 하나가 내가 살던 원룸 세 개는 붙여놓은 크기였다. 비상용 발전기와 정수 시설까지 갖춰져 있었다. 심지어 구석에는 태양광 패널로 충전되는 보조 배터리도 있었다. 부유한 집답게 준비성이 남달랐다. '이 정도면 좀비 아포칼립스가 아니라 캠핑 예능 찍어도 되겠다.' "아저씨, 이제 진짜 얘기해줘요." 이하늘이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소파도 무슨 가죽인지 앉자마자 몸이 푹 파묻혔다. "뭘." 나는 시치미를 뗐다. "그 검이랑, 갑옷이랑, 아저씨 힘이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더는 피할 수 없었다. 이 애는 나를 도와줬고, 지금 이 순간 유일한 편이었다. 숨긴다고 좋을 게 없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말해야 했던 거잖아.' 나는 아이템박스를 열고, 성검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칼날이 실내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이거, 이세계에서 가져온 거야."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세계요?" 이하늘이 눈을 크게 떴다. "5년 전에, 아니 사실 어제. 소환당해서 마왕을 잡으러 갔었어." 나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말하면서도 스스로 웃음이 나왔다. 이걸 누가 믿겠나. '나였으면 안 믿었을 텐데.' 하지만 이하늘은 놀랍게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괴고 뭔가를 계산하는 표정이었다. "그럼 이세계 시간이랑 여기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거네요." 그녀가 차분하게 정리했다. "……그렇게 바로 이해가 돼?" 나는 오히려 당황했다. "저 이과예요. 시간 역설 정도는 소설에서도 흔한 소재잖아요." 이하늘이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성적 좋다는 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나는 상대성 이론 나오면 그냥 넘겼는데.' "그래서 레벨이 1이 된 거고요." 그녀가 덧붙였다. "응, 대부분의 힘이 초기화됐어. 남은 건 이 장비들이랑 아이템박스뿐이야."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하늘이 성검을 조심스럽게 만져봤다. 손끝으로 칼날을 스치듯 훑고, 손잡이의 문양까지 유심히 살폈다. "이거 팔면 얼마 받을 것 같아요?" 그녀가 뜬금없이 물었다. "……그런 생각을 지금 하는 거야?" 나는 어이없어했다. "세상이 이렇게 됐으니, 결국 돈이랑 물자가 있어야 살아남죠." 이하늘이 현실적으로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이 애, 위기 상황에서 계산 빠른 게 예사롭지 않은데.' 나는 아이템박스를 다시 열어 금은보화 상자 하나를 꺼냈다. "이건 팔 필요 없어. 이미 있으니까." 나는 상자를 열어 보여줬다. 금괴와 보석들이 반짝였다. 조명 아래에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이하늘의 눈이 순간 커졌다. "……진짜 이세계 갔다 온 거 맞네요." 그녀가 인정했다. "이제 믿어?" 나는 씩 웃었다. "검보다 이게 더 설득력 있네요." 이하늘이 솔직하게 말했다. '역시, 사람은 돈 앞에서 진심이 나오는구나.' * 우리는 그날부터 계획을 세웠다. 이 오피스텔을 거점으로 삼고, 금은보화를 조금씩 현금이나 물자로 바꿔서 생존 기반을 다지기로. 이하늘은 인근 생존자 네트워크와 물물교환 루트를 이미 어느 정도 파악해두고 있었다. 지도까지 그려가며 어느 구역에 어떤 물자가 있는지, 누가 뭘 파는지 줄줄 꿰고 있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어도, 위기 상황에 순응하는 속도가 남달랐다. '이런 애가 원래 재벌집 딸인가.' 며칠 사이 우리는 통조림, 발전기용 연료, 정수 필터 등을 확보했다. 금괴 한 조각을 내놓았을 뿐인데, 상인들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졌다. 동네 생존자들 사이에서는 '고급 오피스텔에 물자가 넘치는 커플'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커플은 무슨.' 속으로 태클을 걸었지만,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런 세상에서는 소문 하나쯤 정정하는 게 사치였다. 이하늘도 그 소문을 들었는지 어느 날 시큰둥하게 한마디 했다. "저희가 커플이래요, 웃기죠." 그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이 차 신경 안 쓰이나?" 나는 괜히 물었다. "신경 쓰였으면 애초에 같이 안 다녔죠." 이하늘이 단칼에 잘랐다. '그건 또 맞는 말이네.' 그렇게 조용히 안정을 찾아가던 어느 날, 이하늘이 낡은 라디오를 만지다가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건전지가 다 됐나 싶어서 손보던 중이었는데, 다이얼을 돌리다 멈춘 자리에서 잡음이 흘러나왔다. "아저씨, 이거 들어봐요." 그녀가 볼륨을 높였다. 잡음 섞인 방송이 흘러나왔다. 목소리가 지지직거려서 몇 번은 못 알아들을 정도였다. "…레벨 1로 좀비 무리를 섬멸한 인물의 신원 확인을 위해, 청담고 관계자 명단을 조회 중이라는 정보가…" '……청담고 관계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 영상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되는 거야?' 이하늘도 라디오 앞에 딱 붙어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곧, 낯익은 이름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왔다. "…해당 조사는 청담학원 이사장 측 인사인 정재훈 씨가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며…" 나는 그 자리에서 숨을 멈췄다. 심장이 쿵, 하고 한 번 크게 뛰었다. '하필, 그 인간이.' 5년 전, 아니 어제까지도 나를 모욕하던 그 상사가, 이번엔 다른 이유로 나를 찾고 있었다. 이하늘이 나를 힐끗 쳐다봤다. "아저씨, 아는 사람이에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대답을 못 하고 라디오만 멍하니 쳐다봤다. '하필, 정말 하필.' 방금 전까지 안심했던 게 무색해졌다. 세상이 이렇게 좁을 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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