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스릉—
이수아의 단도가 칼집에서 뽑혀 나오는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그 소리는 얇았으나 날카로웠고, 마치 얼음 조각이 부서지는 듯한 청량함마저 품고 있었다. 태영은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으나, 상대의 몸놀림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어 있었다. 이수아의 신형이 순식간에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태영의 측면으로 파고들어 있었다. 잔상마저 남기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언제……' 태영은 눈으로 좇았다고 생각했으나, 이미 그녀는 그의 시야 밖에 서 있었다.
챙강—!
검과 단도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태영의 팔뚝을 타고 격렬한 진동이 전해졌다.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건…… 격이 다르다.' 태영은 이를 악물며 뒤로 물러섰지만, 이수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금 파고들었다. 단도의 궤적이 잔상을 남기며 태영의 어깨를 노렸다.
서걱!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단도가 옷자락을 갈랐다. 다행히 급소는 피했으나, 살갗이 얕게 베이며 뜨거운 피가 배어 나왔다. 태영은 신음을 삼키며 검을 고쳐 잡았다. '여기서 물러서면, 죽는다.' 본능이 그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그는 단동 후기 경지의 진기를 있는 대로 끌어올려, 검신 전체에 실었다. 손끝에서부터 어깨까지, 진기가 밀려드는 감각이 뜨거운 물살처럼 흘렀다.
"제법 근성은 있구나." 이수아가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넘치다 못해 무료함마저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 근성으로 버틸 수 있는 격차가 아니지." 그녀의 단도가 다시 한번 허공을 갈랐고, 태영은 아슬아슬하게 몸을 비틀어 치명타를 피했다. 그러나 완전히 피하지는 못해, 옆구리에 얕은 상처가 하나 더 늘었다. 뜨거운 것이 옆구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감촉에, 태영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태영의 숨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정신은 또렷했지만 몸이 상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팔이 무거워졌고, 다리는 이미 후들거리고 있었다. '이대로는……' 그의 뇌리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세가 제일의 기재라 불리며 자라온 그였다. 동년배 중 그를 능가하는 자는 없었고, 그 자부심으로 지금껏 검을 쥐어왔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여인은, 그 자부심을 산산조각 내고 있었다.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인가.'
그 물음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이수아의 다음 일격이 그의 목덜미를 정확히 노리고 날아들었다. 단도의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기가, 이미 살갗에 닿기도 전에 소름을 돋게 했다. 태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까지인가.'
그러나 그 검격은 끝내 태영에게 닿지 못했다.
"거기까지 하시지요."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산길에 울려 퍼졌다. 어느새 나타난 인영 하나가 태영과 이수아 사이로 끼어들어, 맨손으로 이수아의 단도를 정확히 붙잡아낸 것이었다. 손바닥으로 날붙이의 날을 정면으로 받아낸 것인데도, 그 손에서는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이수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 손속은……' 그녀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서 미간을 좁혔다. 강효였다.
"강씨 세가의 총교관이 여기까지 나오다니, 영광이군." 이수아가 태연한 척 웃으며 단도를 회수하려 했으나, 강효의 손아귀 힘이 만만치 않았다. 손목을 타고 전해지는 압박감에, 그녀의 미소가 잠시 굳었다. "목적이 무엇이오." 강효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눈빛에는 조금 전 태영을 몰아붙이던 이수아를 향한 명백한 경고가 서려 있었다.
"목적이랄 게 있나. 그저 경고 하나 남기려던 참인데." 이수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단도를 강하게 잡아당겼고, 강효는 순순히 손을 놓아주었다. 그 손놀림에는 굳이 상대를 자극하지 않겠다는 계산이 담겨 있었다.
"경고라니, 무슨 뜻이오." "강씨 세가가 요즘 너무 기고만장한 것 같아서 말이야." 이수아의 목소리에 냉소가 짙게 배었다. "여덟 살짜리 애 하나 금단을 이루었다고, 곧 옛 영광을 되찾을 것처럼 들뜬 모양이던데." 강효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이자가 벌써 태호의 일을 알고 있다니.' 세가 내부의 정보가 이미 이씨 가문 쪽으로 흘러들어갔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곧, 세가 안에 밀정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강효의 등줄기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세가 내부의 일이, 그것도 극비에 부쳐졌던 태호의 금단 소식이 벌써 외부로 새어나갔다는 사실은, 단순히 자존심 문제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세가 안에서, 이씨 가문과 내통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이씨 가문이 그 일에 무슨 관심을 두는 것이오." 강효가 물었다. 이수아는 대답 대신 입꼬리만 끌어올렸다.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지."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신형을 뒤로 물려, 나무 그늘 사이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강효가 뒤쫓으려 했으나, 부상당한 태영을 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며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 그녀의 기척은, 이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강효가 태영에게 다가가 상처를 살폈다.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으나, 조금만 대응이 늦었더라면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태영은 창백해진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검을 쥔 손은 여전히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제가…… 밀렸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굴욕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세가 제일의 기재로 자부해왔던 그가, 처음으로 압도적인 격차 앞에서 무력함을 뼈저리게 체감한 순간이었다. 지금껏 그가 마주한 상대들은 모두 그의 검 아래 무릎을 꿇었었다. 그러나 오늘,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얼마나 좁은 우물 안에서 검을 휘둘러왔는지를 깨달았다.
"압도적인 상대였습니다.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강효가 태영을 부축하며 위로했으나, 그의 표정은 더없이 어두웠다. 세가 후계 서열의 태영이 세가 뒷산에서 습격을 당했다는 것, 그리고 그 습격자가 이씨 가문의 강자라는 것.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사안은 이미 개인 간의 다툼을 넘어선 문제였다.
태영을 부축해 산길을 내려오는 동안, 강효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라도 이수아가 다시 나타나지는 않을까 하는 경계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산은 고요했고, 오직 밤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만이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그 고요함이 오히려 강효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경고라 했지. 그렇다면 다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날 밤, 태영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세가 전체로 퍼져나갔다. 강도천은 대청에 긴급히 원로들을 소집했고, 늦은 밤임에도 원로들은 잠옷 위에 겉옷만 걸친 채 서둘러 모여들었다. 대청 안에는 촛불이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 흔들림만큼이나 모인 이들의 표정도 불안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강윤석은 분노를 감추지 못한 채 탁자를 내리쳤다. "이씨 가문이 감히 우리 세가의 후계자를 노려요!" 그의 외침에 대청 안이 다시금 술렁였다. 몇몇 원로들은 당장이라도 이씨 가문을 향해 병력을 보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고, 또 다른 이들은 섣부른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며 반대했다. 대청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에 가까운 소란으로 뒤덮였다.
"조용히들 하시오!" 누군가의 외침에 겨우 소란이 잦아들었다.
강도천은 그 소란 속에서도 침묵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여러 가지 정황이 하나둘 조각처럼 맞춰지고 있었다. 이씨 가문이 최근 부쩍 세를 불리고 있다는 소문, 무맹 대회를 앞두고 여러 문파 사이에 은밀한 견제가 오간다는 소식, 그리고 오늘 밤의 습격까지. 그 조각들이 하나로 꿰어지자, 섬뜩한 그림 하나가 완성되었다. '단순한 도발이 아니다.' 강도천은 눈을 뜨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이씨 가문이 우리 세가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가주님, 그렇다면……" 원로 하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방비를 강화한다. 특히 태호와 태영, 두 아이의 신변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야." 강도천의 목소리는 단호했으나, 그 이면에는 감출 수 없는 근심이 서려 있었다. 세가의 희망인 태호와, 세가의 후계자인 태영.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잃는다면, 강씨 세가의 미래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릴 것이었다.
"밀정에 대해서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강효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의 말에 대청 안이 순간 얼어붙었다. 밀정이라는 두 글자가 던지는 무게가, 이 자리에 모인 모두의 얼굴을 굳게 만들었다. "태호의 금단 소식이, 세가 내부에서도 극히 일부만 알고 있던 그 소식이, 이미 이씨 가문의 귀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강효의 말에 원로들 사이에서 낮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세가 안에 세작이 있다는 뜻인가!" 강윤석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그리 결론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강효가 담담히 답했다. 대청 안은 다시 한번 술렁였으나, 이번의 술렁임은 분노가 아닌 불안에 가까웠다. 내부의 적이라는 존재는, 외부의 적보다 훨씬 더 서늘한 공포를 자아내는 법이었다.
강도천은 그 술렁임을 잠재우듯 손을 들었다. "밀정의 색출은 은밀히 진행한다. 섣불리 움직이면 오히려 상대에게 우리의 대응을 알리는 꼴이 될 것이야."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부터 이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는, 이 대청을 벗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게 그날 밤의 회의는, 무거운 침묵과 함께 끝을 맺었다.
그 소식은 다음 날 아침, 태호의 귀에도 들어갔다. "형님이…… 습격을 당하셨다고요?" 태호는 놀란 얼굴로 강효에게 되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함께, 미처 감추지 못한 두려움도 섞여 있었다.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 그러나 이씨 가문이 우리 세가를 향해 본격적으로 이빨을 드러냈다는 뜻이니, 앞으로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야." 강효의 말에 태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을 뵈어도 되겠습니까." 태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은 요양 중이시다. 상처는 깊지 않으나, 마음의 충격이 상당하신 듯하니, 조금 시간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이야." 강효의 말에, 태호는 문득 형의 얼굴을 떠올렸다.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형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날 하루 종일, 태호는 어수선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세가 곳곳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하인들의 얼굴에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라면 활기로 가득했을 연무장도, 오늘만큼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태호는 그 공기 속에서, 세가가 처한 위기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꼈다.
그날 밤, 태호는 홀로 방 안에 앉아 단전 깊숙한 곳의 검은 기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상하게도, 태영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그 검은 기운이 미세하게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처럼, 그 기운은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실은…… 위험을 감지하는 것일까.'
태호는 조심스레 내기를 끌어올려 그 검은 기운에 다가가 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기운이 그의 접근에 반응하듯 미세하게 파동을 일으켰다. 마치 무언가에 반응하듯, 혹은 무언가를 기다리듯. 그 파동은 형언할 수 없이 낯선 감각이었다. 통증도, 기쁨도 아닌, 그저 이질적인 무언가가 그의 단전 안에서 숨 쉬고 있다는 확신.
태호는 그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만약 이 검은 기운이 정말로 위험을 감지하고 반응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이 기운이 단순한 내공의 일종이 아니라, 어떤 의지를 가진 존재에 가깝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그 의지는, 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단 말인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점점 더 무겁게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달빛이 방 안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으나, 태호의 마음속 어둠은 그 달빛으로도 씻겨 나가지 않았다. 그는 오래도록 그 검은 기운을 들여다보며,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